이송희일의 영화직설 < 오피니언 < 기사목록 - 노동과세계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내일은 당신 차례입니다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4.04.08 13:47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이라는 단편영화를 상영한 적이 있다. GV 시간에 관객과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카메라로 우리를 촬영하던 중년의 남성이 손을 들었다. 일반 관객은 아닌 듯하고 영화제 관계자인가 싶은데, 무슨 질문이 있어 손을 드는가 의뭉스러웠다. 마침 극장 안이 침침한 조명이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니, 낯익은 얼굴. '지성 아빠'였다. 세월호 집회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아마 한 번쯤 지성 아빠를 봤을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있는 곳이면 언제나 카메라를 들고 순간을 기록하던 유가족, 지성 아빠로 더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늑대가 온다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3.12.11 09:34
농촌은 언제까지 천대를 받아야 할까? 얼마 전 어느 기후 관련 세미나에서도 동어반복의 씁쓸함을 느꼈다. 농어촌 재생에너지에 관한 이야기가 잠시 나온 터였다. 농촌의 태양광과 어촌의 풍력 터빈을 걱정했더니 모 환경연구소의 연구원이 한국 농어촌이 유럽의 농어촌처럼 정부와 협치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농어촌을 잠식하는 재생에너지와 녹색전환 갈등 문제를 단지 토지 수용의 ‘절차’ 과정으로만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 관점에 따르면, 한국의 농어촌 시민들은 정부와 기업의 재생에너지 확대에 반발하는 이기적이고 낙후된 인식을 가진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헌법재판소, 나치가 아니라고 말해봐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3.11.08 11:08
2021년 한 편의 영화가 모스크바 국제영화제를 뒤흔들었다. 영화 상영을 중지해달라는 요청이 검찰청에 접수되고, ‘동성애 선전을 중단하라’는 현수막을 든 시위대가 극장 앞을 휘저었으며, 무려 92개의 러시아 언론들이 이 영화가 얼마나 끔찍하고 수치스러운지를 성토하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결국 영화제 측은 모든 티켓 판매를 중단했고, 관객이 없는 상태로 영화가 상영됐다.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수십 차례 살해 협박이 가해지기도 했다. 영화 한 편을 둘러싼 졸렬한 야단법석과 극우적 맹동은 러시아에 드리워진 권위주의의 무게를 가늠하게 한다.화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주윤발과 유인촌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3.10.10 10:25
주윤발이 한국 SNS를 달궜다. 올해 데뷔 50주년을 맞이한 그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참가해 ‘올해의 아시아 영화인상’을 받았고, 그 기자회견 내용이 화제에 올랐다. 8100억원을 사회에 기부한 그는 공을 아내에게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갈 때 빈손으로 가도 상관없다. 나는 매일 흰 밥 두 그릇이면 충분하다.”전 재산을 기부하고도 ‘흰 밥 두 그릇’의 검약을 아무렇지 않은 듯 웃는 낯으로 조곤조곤 이야기하던 그는, 뒤이어 매일 연기를 하고 싶다며 영화에 대한 애정을 물씬 과시했다.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포옹은 강하다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3.09.08 13:04
서이초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자연스레 떠오르는 영화 한 편이 있었다. (2011). 한 담임교사가 캐나다 몬트리올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자살한다. 초등학생이 이를 발견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뒤이어 알제리 출신의 라자르가 담임으로 새로 부임하게 되고, 학생들과 크고 작은 갈등을 겪으며 상처를 치유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가 주목하는 존재는 교사가 아니라 아이들이다. 비극적 사건 속에서 가장 상처 입은 존재는 바로 ‘아이들’이라고 말한다. 전 담임교사는 왜 자살했을까?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악몽의 인질극, 새만금 잼버리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3.08.08 17:45
웨스 앤더슨의 (2012)의 주인공 중 한 명은 보이 스카우트 대원이다. 이 영화는 부모를 잃고 위탁가정에서 살던 12살 문제아 소년 샘이 스카우트 야영지를 도망쳐 소녀 수지와 도망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경찰과 가족 등 모든 사람들이 사랑에 빠진 소년소녀를 뒤쫓는 유쾌한 소동극 속에서, 스카우트 대원들의 우정과 모험심, 때론 반목과 갈등이 아름다운 섬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감독의 유년 시절 기억이 영화의 단초였다. 웨스 앤더슨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아주 짧게 1주일 정도 보이 스카우트 캠프에 참여했지만 제대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한국 간장 종지들의 노래, 블랙리스트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3.07.03 13:47
2018년 당시 문체부장관에 막 취임한 도종환 전 장관이 주최하는 식사 자리에 나간 적이 있다. 개그맨, 배우, 영화감독 등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10명 내외의 사람들을 초청한 자리였다. 도종환 전 장관은 도의의 책임을 진다며 사과했고, 자신의 시집을 나눠주며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사람이 있는 문화’를 만들겠노라 약속했다. 사실 당사자도 아닌데 왜 사과를 하는지 잘 모르겠고 그렇게 분위기 미묘한 순간에 꼭 본인의 시집을 나눠줘야 하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다시는 문체부에서 이런 악행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고만 첨언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최저임금에 대한 저주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3.06.08 12:34
"이것은 미국 노동자에 대한 모욕이며 우리 경제에 나쁜 일입니다. 오늘날의 최저임금은 기아 임금입니다. 최저임금 노동자는 이 나라에서 방 2개짜리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반면 제프 베조스 같은 억만장자는 25개의 욕실과 5개의 거실을 갖춘 워싱턴 DC 저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경제학자이자 클린턴 정부 하의 노동부 장관이었다가 관료들의 친자본 행보에 과감히 사표를 던졌던 로버트 라이시. 현재에도 SNS와 언론 지면을 통해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줄기차게 내고 있다. 그는 친기업 세력과 보수 언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30초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3.05.09 09:23
2019년에 만들었던 독립영화 를 개봉했다. 코로나 때문에 창고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한국영화 중 한 편이다. ‘외면’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무관심 일색의 피드백. 우여곡절 끝에 개봉한 터라 속이 쓰리다. 물론 다른 재현 매체에 비해 큰 예산과 많은 인력이 투여되는 영화의 운명은 창작자 개인의 의지를 초과한다. 관객들을 매혹할 만한 완성도를 지니지 못했다는 자책 한편으로, 한 지인의 말마따나 ‘한국영화의 위기’라는 구조적 배경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계에 곡소리가 한창이다. 통계만 봐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AI 챗봇에 집착하기 전에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3.04.10 09:17
며칠 전, 벨기에의 한 남자가 인공지능 챗봇과 대화를 나누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6주간 이어진 대화에서 AI 챗봇이 남긴 마지막 문장은 이거였다.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가 되어 살 거예요.”세계 언론들이 충격에 사로잡혀 이 소식을 바삐 실어날랐다. 두 어린 자녀를 둔 30대의 이 보건 연구원은 심각한 ‘기후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지구 온난화에 대해 절망적인 상태였고 친구와 가족들과도 고립된 채였다. 인간들은 더 이상 기후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여긴 나머지 6주 전부터 마치 마지막 피난처라도 되는 듯 AI 챗봇과의 대화에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기쁨의 도시를 아시나요?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3.03.09 18:13
얼마 전 강연을 끝내고 뒤돌아서는데 한 분이 질문이 있다며 다가왔다. 강연 중에 전기자동차와 디지털 상품의 생산 이면에 저렴한 노동과 자연에 대한 수탈이 깃들어 있다는 이야기를 잠시 했는데, 그 부분에 대한 이의제기였다. 디지털 기술이 보다 발전하면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난점들이 해결될 수 있고, 설령 그런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기술 발전의 당위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거였다. 그 ‘어쩔 수 없는 것’이란 표현이 가시처럼 목에 턱 걸렸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악의를 드러내지 않는 선량한 얼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누가 65세를 모함했나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3.02.07 13:36
(1988)는 국내에서도 상당히 주목받은 작품이다. 개봉은 물론 TV에서 더빙판과 메이킹 필름을 방영하기도 했다. 애니메이션과 실사로 이루어진 로버트 저메키스의 화제작으로 살인 누명을 쓴 로저 래빗과 탐정이 악당 판사로부터 만화동산을 지켜낸다는 내용인데, 미키 마우스 등 인기 디즈니 캐릭터들이 총출동한 가운데 독특하게 필름 누아르 형식을 빌려 사건을 전개한다.그런데 인기에 반해, 이 영화의 배경이1940년대 LA 도시전설이라는 사실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른바, ‘자동차 음모론’. 영화가 시작되자마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장애인도 감옥에 갇힐 권리가 있다고요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3.01.06 15:41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한 장애 여성이 낄낄거리며 버스 정류장에 낙서를 한다. Piss on Pity. 동정심에 오줌을 갈겨라. 90년대 초중반 영국 장애운동사를 대표적으로 수식한 슬로건인 동시에, BBC2 TV영화 의 핵심을 짚는 중요한 키워드다. 젊은 장애인 커플의 러브스토리와 영국 장애운동사를 엮어낸 이 작품은 올해 초부터 넷플릭스에서 전 세계에 스트리밍되고 있다. 영화 오프닝의 패기에 걸맞게, 기존의 장애인 영화들이 흔히 답습해온 연민의 시선이나 표피적인 피해자성과 단호히 결별하고 장애인의 복잡다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김진표 국회의장을 위한 강추 드라마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2.12.07 18:16
김진표 국회의장에게 강력하게 추천하는 미드 한 편이 있다.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죽거나, 혹은 애도하거나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2.11.07 13:32
가슴을 쓸어내렸다. 봉화 광산에서 두 명의 광산 노동자가 생환했다는 소식에 시민들 모두 반색했다. 221시간 만에 어둔 갱도 끝에서 광부들이 마주한 그 생의 빛은 연이은 참사로 시름에 잠긴 시민들에게도 한 줄기 위로였을 터다. 커피믹스와 떨어지는 물, 숙련노동자의 지혜, 그리고 서로의 어깨의 온도가 버팀의 동력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먼빛으로 들려오는 발파 소리. 자신들을 구하러 성큼성큼 가까워지는 그 발파 소리가 희망의 동아줄이었다고 밝혔다. 짐짓 그 발파 소리는 국가와 사회가 두 사람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약속의 시그널이었을 것이다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계급투쟁 없는 환경운동은 정원가꾸기다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2.10.06 10:17
1988년 12월 22일, 브라질 아크레 지역의 작은 도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당시 44살이던 치코 멘데스는 샤워를 하러 뒷마당으로 가다 산탄총을 맞고 고꾸라졌다. ‘아마존의 간디’라는 애칭을 가진 남자의 피가 뒷마당 진창을 적셨다. 며칠 후 그의 장례식에서 젊은 룰라(브라질 전 대통령)가 관 앞에서 비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나는 치코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이 나라 전체의 신앙고백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 진보정당, 노동조합 운동의 약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치코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브라질 노동계급 해방의 시작입니다.”아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탑건'과 정치적 올바름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2.09.05 17:27
"소위 '정치적 올바름'의 시대에 멸종된 줄 알았던 미국적인 미국영화를 만났다."여기에서 가장 미국적인 영화란 을 말한다. 모 지면에 실린 영화 칼럼의 한 문장. 또 어느 평론가는 '최근 블록버스터들이 앞다투어 유행처럼 다루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이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찬했다. 칼럼 지면뿐 아니라, 국내 개봉 후 관객의 상당수는 각종 커뮤니티와 SNS에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얼룩이 묻지 않았다며 기이할 정도로 열광적 환호를 보냈다. 나무위키의 이 문장은 환호의 절정을 이룬다."억지로 정치적 올바름을 넣는 것이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13명의 피의 주부들'과 공산주의자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2.08.08 10:01
호주 헌터스 힐의 덤불숲(Kelly's Bush)은 백인 정착지 옆에 딸린 미개간지였다. 주머니쥐와 토종 조류가 서식하고, 오래된 원주민 건물들이 자리하는 숲. 지역 시의원들은 진드기 투성이의 쓰레기장이라며 허투로 취급했다. 그러다 1971년 시 당국이 이곳에 고층 아파트를 짓겠다고 발표했다.인근에 살던 전업주부들이 개발에 반대했다. 부자들의 고층 아파트를 짓느라 풍요로운 공유지를 파괴해선 안 된다는 거였다. 그들은 유력 정치인들과 언론사에 호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시장은 '13명의 피의 주부들'이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낙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물은 누구의 것인가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2.07.05 13:33
1974년에 제작된 로만 폴란스키의 필름 누아르 . 영화사에서 가장 뛰어난 시나리오 중 한 편으로 손꼽히는 걸작이지만, 한편으론 50여년을 앞질러 기후위기 시대의 풍경을 정확히 예시해주고 있다. 좋은 영화는 시간을 관통한다.은 오일쇼크와 환경 위기 담론으로 점철된 70년대의 자장 안에서 태어난 작품이다. 로마 클럽의 를 비롯한 생태와 기후위기 담론이 매스미디어에조차 격렬히 개진되던 때. 영리하게도 필름 누아르와 멜로드라마의 외피를 빌려, 자본주의가 어떻게 환경과 공유재의 권리를 사유화하며 도시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누가 괴물인가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2.05.09 12:51
어떤 영화의 첫 시사회. 관객들이 소스라치며 뛰쳐나갔고, 한 관객은 영화 때문에 유산이 됐다며 제작사를 고소했다. 감독은 곧장 비난에 휩싸였다. 얼마 가지 않아 헐리우드에서 사라졌다. 주조연 배우 일부도 캐스팅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영국에선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영화'라는 이유로 32년간 상영 금지됐다. 현재에도 미국 일부 지역에선 상영할 수 없다. 1960년대 반문화와 청년문화의 물결 속에서 하위 주체들의 저항을 다룬 작품으로 인용되며 잠깐 빛을 봤지만, 9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논쟁 속에 휩싸여 있다.1932년 토드 브라우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꿀벌의 실종은 예언이다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2.04.07 17:32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 전국에서 100억 마리의 꿀벌이 감쪽같이 실종됐다.2010년 감염병으로 토종벌 60% 이상이 폐사한 후 12년만에 다시 꿀벌이 사라지는 초유의 사태. 전국 양봉 농가들은 텅 빈 벌통 앞에서 망연자실했고 언론과 전문가들이 요란스레 온갖 가설들을 제출한다. 말벌, 살충제, 응애, 이상 기온, 장마 등 온갖 범인들이 지목됐지만, 단일 원인이 아니라 복합적 요소가 뒤섞여 있다는 두루뭉술한 진단이 대체적이다.2006년 꿀벌이 돌아오지 않는 '군집 붕괴 현상'이 처음 보고됐을 때도 그랬다. 원인을 특정하지 못하고 미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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