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구의? 국강현 광주광역시 광산구의회 기획총무위원회 위원장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존재가 있다. 국강현. 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 떠날 수 없는 물은 바로 대중이란다. 지난해 5·31 지방선거에서 광주 광산구의 ‘민주당 열풍’을 잠재우고 당당히 1등으로 구의원에 당선된 국강현 의원(42세. 광주광역시 광산구의회 기획총무위원회 위원장). 도농복합지역인 광산구에서 민주노동당은 4명의 후보를 당선시켰다. 농민,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가능한 일이었다. 14명 구의원 중 민주당이 8명, 민주노동당이 4명, 열린우리당과 무소속이 각각 1명씩이다.
이에 대해 국의원은 “성공이 아니고 선방”이라고 평가한다. “다수의 표결로 소수의 의견을 뭉개고 짓밟는 의정 현실이 가슴 아픕니다. 국회에서도 민주노동당 9명 의원들이 얼마나 설움을 받습니까. 적은 힘을 가진 정당은 항의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정도지, 뜻을 관철시킬 수 없습니다. 이런 현실을 극복하려면 의원을 더 많이 생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선방한 결과에 안주해서 나태하거나 느슨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일침을 가한다. 초심의 비장한 긴장감을 가지고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더 날을 세워야 한다는 것.
이는 비단 정당만의 과제가 아니라는 것이 국의원의 진단이다. 11%의 조직률을 가진 민주노총이 30%의 노동자들을 조직했을 때 노동계급의 힘이 얼마나 커지겠느냐는 것. 국강원 의원은 87년 현장에서 노동조합 결성을 지켜봤다. 경기도 안산에서 그는 철공소 용접공이었다. 형편없는 작업환경과 불규칙적인 급여, 저임금, 관리자들의 횡포에 맞서 벼르던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었다. 그러자 월급도 잘 나오고 식당밥과 작업복도 달라졌다. 국의원은 “거기에 맛을 들여 지금까지 (운동을)한다”고 말한다.
그는 민주노총산하 금속노조 조합원이다. 89년 자동차부품 조립업체인 동진금속에 들어가 노조를 결성하려다 사용자의 완강한 방해공작으로 와해되고 4개월간 버티다 결국 쫓겨나기도 했다. 그후 위장병 악화로 낙향해 농사를 지었다. 현장을 떠나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는 농민운동을 했다. 시골에서 요양하는 과정에서 몸은 아파도 사람이 그리웠다. 99년 복귀해 기아자동차 시트를 제작하는 공장 비정규직으로 들어간 그는 99년 노조위원장이 됐다. 2004년까지 활동하면서 다른 중소영세사업장들과 연대해 임금인상 파업투쟁을 벌였다.
국의원이 정치에 진출하게 된 계기는 2003년 10월26일 종묘공원에서 열린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 당시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광주본부장이었던 이용석 열사의 분신 현장에서였다. 광주 비정규직 조직특위위원장이었던 국의원은 광주로 내려오면서 총선 출마를 결심했다. 노동자의 정치진출만이 현실을 갈아엎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기초의원으로서의 한계가 너무 많습니다. 주민 살림과 밀접한 사람들일 뿐이지, 입법권한은 전혀 없기 때문에 법제도적으로 다가서기에 버겁습니다. 그래도 의정활동 과정에서 부도난 임대아파트 서민들의 권리보장이나 한미에프티에이협정 반대, 이라크파병 반대 건의문 등을 국회 관련부서에 올리곤 합니다.” 국의원은 자신이 기초자치단체에 있지만 작은 노력 하나하나가 국민을 올바로 세워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현장에 머물면 안됩니다. 노동조합 일상활동을 통해 지역주민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조건이 닿는 대로 팀·단·조 단위로 주민들과 함께 하려는 노력과 시도가 필요합니다. 민주노총은 대중에게서 고립되지 않고 노동계급의 요구를 선전해내야 합니다. ‘철밥통 파업’이니 ‘배부른 노동자들의 투쟁’이니 하는 비판을 받는다면 자본과 정권을 이길 수 없습니다.”
민주노총에 대해서도 따끔한 충고를 던지는 국강현 의원. “열악한 광산구 예산을 허튼 데 쓰지 못하도록 형평성 있는 분배를 위해 의회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제대로 해 나가갈 것”이라며 그는 2010년 5월까지 주어진 임기를 민주노동당 창당정신과 강령에 따라서 자신보다 주민들을 위해 열심히 살겠다는 각오다.
홍미리 기자 gommiri@naver.com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노동과세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