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도전, 노동계급의 응전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 노동계급은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노동계급의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면, 우리 사회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으로 구성되어있는 사회계급적 현실이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근로대중이란 농민과 서민을 뜻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놀고먹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힘으로 일으켜 세우고, 그들의 생산노동으로 유지하며, 그들의 투쟁으로 발전시켜 가는 사회이다.
과학기술이 진보하여 생산공정이 자동화되는 추세에 따라 생산노동의 방식이 달라지겠지만, 생산노동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이 세계에 존재하는 한, 생산노동은 영원하다.
사람의 생산노동이 동물계의 생존활동과 근본적으로 다른 까닭은, 사람이 자기의 자주적, 창조적 활동을 생산노동으로 전개하기 때문이다. 생산노동은 자본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원래 사람에게 고유한 본성적 활동이다.
생산노동은 사회적 관계를 이루는 여러 부문들 가운데 하나인 ‘노동부문’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근본이며, 노동계급은 사회적 관계를 이루는 여러 계급, 계층들 가운데 하나인 ‘노동계’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중추이다. 생산노동이 억눌리면 사회적 관계의 근본이 억눌리는 것이요, 노동계급이 짓밟히면 사회적 관계의 중추가 부러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으로 구성되었지만, 사회구성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노동계급에게 있다. 농민과 서민 같은 근로대중들은 장차 사회역사발전이 높은 단계로 들어설 때 노동계급으로 자기의 존재를 바꾸면서 자동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모든 사회구성원이 노동계급으로 전환되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며, 사회발전의 궁극적 목적이다. 그런 뜻에서 노동계급은 영원한 사회계급이며, 인류의 미래상을 지닌 유일한 사회계급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에서 노동계급의 현실은 거꾸로 쳐박혀있다. 노동계급에게는 영예로운 이름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가난과 불행과 소외의 대명사라는 낙인이 찍혀있다. 노동계급이 영원한 사회계급이며, 인류의 미래상을 지닌 유일한 사회계급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그러한 말조차 마음놓고 꺼내기 힘들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자본주의는 사람의 노동력을 돈으로 사고 팔게 만들어 노동을 자본의 지배와 착취 아래에 묶어둠으로써 생산노동에서 자주성을 제거하였다. 그래서 노동의 신성함은 여지없이 짓밟혔다. 자본주의생산현장에 존재하는 노동에서는 자주성을 찾아볼 수 없다. 그 현장에서는 생산과정을 통째로 장악한 자본가들이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작업지시를 내리면서 시키는 대로 일하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형성된다. 그러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지배력을 행사하는 자본가들이 노동계급이 생산한 엄청난 가치들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은밀한 착취는 이 순간에도 계속된다. 생산현장 밖에 있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생산과정에서 끝없이 착취를 당하는 노동계급마저도 실감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자행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착취는 교활하기 짝이 없다.
자본가와 그 하수인들이 내려보내는 작업지시에 무조건 복종함으로써 자신이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주어진 작업일정에 따라 그저 묵묵히 일하는 그런 노동에서 자주성이 있을 리 없다. 자주성을 제거 당한 생산노동을 임금노동이라 한다.
자본가에게 돈을 받고 노동력을 팔아먹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에 따라 사회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서로 도와주며 협동적으로 일하는 그런 노동을 해야, 노동계급이 세계의 주인으로 허리를 펴고 살 수 있게 된다.
노동계급이 갈망해온 ‘새로운 세상’은 노동계급이 세계의 주인으로 일어나 허리를 펴고 사는 세상이다. 노동계급이 임단협을 천년 동안 계속해도 그런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노동계급이 진보세력으로 단결하여 자기의 정당을 만들고, 집권의지를 관철시키는 투쟁에 나서지 않는 한, 새로운 세상은 한낱 ‘그림의 떡’으로 보일 뿐이다.
노동자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후대들이 가난과 불행과 소외의 운명에서 벗어나 허리를 펴고 살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오늘 우리 노동계급의 역사적 임무이다.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임무를 위해서 조그만 흔적이라도 남기고 가는 것이, 이 시대의 노동계급이 걸어가야 할 값진 인생길이다. 노동계급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라는 물음에 ‘조그만 흔적’을 답으로 남기는 노동자는 참으로 행복하다.

2. 새로운 도전을 눈앞에 두고

올해 하반기에 이르면, 이 땅의 노동계급은 새로운 도전을 받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5년을 주기로 되풀이되는 대통령선거라고 부르는 도전이다. 노동계급이 자기의 정치적 의사를 관철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가 선거를 통해서 결정된다는 뜻에서, 선거는 그들에게 하나의 도전이다. 또한 선거라는 도전에 어떻게 응전하느냐에 따라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운명과 경제적 생활조건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에서, 선거는 그들에게 도전으로 된다.
그러나 선거가 노동계급에게 도전으로 되는 더 커다란 이유는 따로 있다. 선거에서 노동계급이 정치적 요구를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가 노동계급의 정치적 요구와 무관하게 또는 그에 반해서 진행된 것이다. 역사적 경험을 돌아보면, 1948년 5월 10일 이 땅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선거 이후 지금까지 수없이 되풀이되어온 선거에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요구는 실종되었다.
김영삼정권은 군사독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바람에 정권교체의 성격이 좀 불투명하였지만, 김대중정권과 그 뒤를 이어 등장한 노무현정권을 세운 정치세력은 분명히 1987년 6월항쟁의 주역들이었으며, 바로 그러한 점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하였다.
그러나 1987년 6월항쟁이 일어난 때로부터 10년이 지난 뒤에야 김대중정권이 등장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그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정권교체를 6월항쟁의 직접적 성과라고 인정하기 힘들다. 또한 오늘 노무현정권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으로부터 매우 강한 저항을 받고 있다. ‘민주세력의 집권’이라는 간판을 내건 정권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으로부터 외면과 저항을 받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이 민주세력이 아니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6월항쟁의 주역을 자처하는 집권세력이 자랑하는 ‘정권교체’는 노동계급이 요구하는 정권교체가 아니었다. 노동계급의 눈으로 바라보면, 노동계급이 자기의 정치적 요구를 실현하지 못한 정권교체를 정권교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김대중정권과 노무현정권의 등장은 노동계급을 짓누르는 지배계급 내부의 정치파벌들 사이에서 자기들끼리 정권을 교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노동계급이 선거를 통해서 자기의 정치적 요구를 실현하는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다면,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는 노동계급이 정치적으로 소외되거나 짓눌리지 않고 경제적으로 고통을 겪지 않는 전혀 다른 성격의 사회로 발전되었을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정권교체는 아직 미래에 일어날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므로, 오늘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정권교체는 여전히 추구해야 할 정치과업이자 전략목표이다. 그런데 바로 그 정치과업을 가장 심각하게 제기하는 대선이 다가오고 있다. 노동계급은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

3. 수수께끼 같은 물음

선거는 유권자들이 자기의 정치적 의사를 투표로 결정하는 민주주의제도이다. 유권자의 절대다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인데, 그 가운데서도 노동계급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처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유권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유권자들이 자기의 정치적 요구를 표현하는 선거에서는 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적 요구가 번번이 실종되는 것일까?
모든 정치행위는 정치의식의 결과이며, 모든 정치의식은 사회계급관계를 반영한다. 사회계급관계를 반영하지 않는 정치의식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선거만은 예외가 된다. 선거라는 정치행위는 사회계급관계를 직접적으로 반영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수탈을 전면적으로 보장할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는 유권자들은, 여론조사에서 50%가 넘는 것으로 나오는데,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여 싸우는 유일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는 10%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는 50%의 유권자들 가운데 40%는, 그 협정체결로 치닫고 있는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및 탈당파가 내세우는 대선후보를 선택할 것이다.
노동계급은 왜 선거에서 자기의 정치의식을 굴절시키는 것일까? 선거는 왜 사회계급관계를 직접적으로 반영하지 않는 것일까?
수수께끼 같은 이 문제를 해명하지 못하는 한, 선거는 여전히 노동계급의 정치행위로 될 수 없으며 노동계급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소외된 방외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수수께끼 같은 물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해답을 찾을 수 있다.
3-1) 노동계급의 생각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선거에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요구가 실종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생각은 매우 혼란스럽고 복잡하다. 온갖 비노동계급적 요인들이 침투하여 노동계급의 생각을 변질시키고 분열시켜놓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노동계급에 속했으면서도, 텔레비전 연속극에 나오는 도시중산층처럼 생각하고, 도시중산층의 생활양식을 흉내내고, 자신을 도시중산층이라고 착각하는 개별적 노동자들이 너무도 많다. 사무직 노동자들이 그러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생산직 노동자들도 그러한 풍조를 따르고 있다.
그렇게 된 까닭은, 학교교육, 대중언론, 종교활동, 사회여론, 상품문화, 그리고 개별적 대인관계의 경험이나 가족관계 등을 통해서 마구 스며들어온 비노동계급적 요인들이 노동계급의 정치의식이 자라지 못하게 생각을 교란하고 변질시키고 분열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 말하자면 너무 일상화되어서 으레 그러려니 하고 느끼는 노동계급의 실제 현실이다.
온갖 비노동계급적 요인들에 휘감겨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버린 노동계급의 생각은 더 이상 노동계급의 고유한 정치의식이 아니다.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노동계급은 자기의 고유한 정치의식을 갖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노동계급이 자기의 고유한 정치의식을 갖지 못한 채 의식분열증에 빠져있으므로 그들의 행동통일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조합원들의 총의에 따라 총파업을 결의했어도, 파업지도부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끝장을 볼 때까지 전투적으로 밀고 나가지 못하고 도중에 주저앉는 만성적인 무기력증의 원인이 거기에 있다. 총파업에서조차 그러하므로 선거에서 행동통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3-2) 노동계급이 집권의지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선거에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요구가 실종되는 것이다.
오늘 노동계급에게 집권의지가 있는가 라는 물음을 던질 때, 자신 있게 집권의지가 있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동계급의 집권의지는 허공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역량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정치역량을 세력화한 것이 진보정당이다.
이처럼 노동계급이 자기의 집권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정당은 명백하게도 진보정당밖에 없는데도, 우리 사회의 노동계급은 선거에서 진보정당의 후보에게 표를 주지지 않는다. 이것은 노동계급에게 집권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집권의지를 갖지 못한 노동계급은 자기들의 정치적 요구에 따라 표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여론의 움직임에 따라 표를 던진다. 노동계급의 정치적 요구에 의해서 좌우되어야 할 선거판이 여론에 의해서 좌우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여론은 대중언론이 틀어쥐고 있고, 대중언론은 자본가들이 통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 목소리가 가장 큰 대중언론들은 예외 없이 자본의 시장지배력에 복종한다. 대중언론은 노동계급에게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서비스상품을 생산하고 교환하고 유통하는 거대한 자본주의언론시장이다.
노동계급의 정치적 요구가 실현되어야 할 선거는, 노동계급의 반대편에 있는 자본가들이 자본주의언론시장을 통하여 자기들의 정치적 요구를 실현하는 선거로 뒤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있는 노동계급이 정치적으로 소외된 채 실시되는 선거는, 지배계급 내부에서 갈등하는 여러 정치파벌들의 난타전으로 될 수밖에 없다. 탈당, 분당, 창당, 합당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자기들끼리 서로 물고 뜯고 하는 권력욕 중독자들의 난타전을 바라보는 것은, 노동계급에게 진절머리가 나는 고역이다.

4. 노동계급의 집권임무와 새로운 정치운동

노동계급이 요구하는 정권교체란, 노동계급이 근로대중과 정치적으로 연대하여 세력화하고 그 힘으로 집권하는 것을 뜻한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정치적으로 연대하여 세력화할 때, 진보세력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한다.
요즈음 ‘진보개혁세력’이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그 말은 실체가 없는 허구이다. 진보세력과 중도개혁세력 사이에는 동일한 정치세력으로 볼 수 없는 차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른 세력들이다. 진보세력은 도시중산층이 결집한 세력이 아니라 노동계급이 근로대중과 정치적으로 연대한 세력이다. 그러한 진보세력이 집권을 목적으로 하여 세운 조직을 진보정당이라 한다.
오늘 이 땅에는 보수세력을 대표하는 한나라당, 중도개혁세력을 대표하는 열린우리당 및 탈당파, 그리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진보적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민주노동당이 존재한다. 그런데 집권문제를 놓고 팽팽하게 맞서있는 보수세력과 중도개혁세력은 자기들끼리 서로 번갈아 집권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의 눈에 진보세력은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보인다. 보수정당과 중도개혁정당이 서로 번갈아 교대집권하는 양당제라는 것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요구를 합법적으로 억눌러 결국 노동계급이 영구히 집권의지를 갖지 못하게 만드는 제도적 장치이다. 만일 진보정당이 더욱 약화되면서 정치권이 양당제로 고착된다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정치적 무권리상태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다.
문제를 푸는 지름길은 노동계급이 집권의지를 갖는 것인데, 노동계급이 집권의지를 갖는 것은 말처럼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니다. 노조지도부와 현장활동가들이 조합원들에게 집권의지를 나누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집권의지를 갖지 못한 노조지도부나 현장활동가들도 많다. 노동조합은 노동계급의 사회적 책임이나 정치적 임무를 외면하고 조합원들의 임금인상에만 집중하는 바람에, 거대한 이익집단으로 되고 말았다는 따거운 눈총을 받고 있다.
이제 노동계급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은 명백하다. 노동조합이 거대한 이익집단으로 남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향해 열린 노동운동을 벌이면 문제를 풀 수 있다. 정당이 정치인들끼리 벌이는 권력쟁탈을 위해 존재하는 정치조직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향해 열린 정치활동공간으로 되어야 하듯이, 노동조합 역시 조합원들끼리 자기들의 이익을 얻기 위해 존재하는 이익집단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향해 열린 노동운동의 주체로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회 전체를 향해 열린 노동운동이란 무엇일까? 사회 전체를 향해 열렸다는 말은 사회적 책임과 정치적 임무를 수행한다는 뜻이다. 노동계급의 사회적 책임이란, 노동계급이 농민, 서민과 연대하여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한 온갖 문제들을 풀어 가는 것을 뜻한다. 또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임무란, 노동계급이 농민, 서민과 함께 연대하여 진보정당을 강화하고, 그 정당을 앞세워서 정권교체를 실현하는 집권임무를 뜻한다.
노동조합이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서 정치적 임무만 수행하려는 것은, 노동계급의 집권임무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 내부의 몇몇 정파들이 자기들의 정치적 요구를 실현하는 행위로 변질될 수 있다. 거꾸로, 노동조합이 정치적 임무를 외면하면서 사회적 책임만 감당하려는 것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사회적 관계 자체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둔 채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만 해결하려고 애쓰는 헛수고로 될 수 있다.
노동조합이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는 운동주체로 되려면, 거기에 망라된 노동계급이 자기의 사회적 책임과 정치적 임무를 함께 수행하는 운동에 나서야 한다. 노동계급의 사회적 책임과 정치적 임무를 수행하는 노동운동을 새로운 정치운동이라고 부른다.
정치운동이라는 말 앞에 왜 새롭다는 꾸밈말을 올려놓아야 할까? 이 땅의 노동운동사를 되돌아보면, 조합원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노동조합운동은 이제껏 확대, 발전되어왔지만, 노동계급이 사회적 책임과 정치적 임무를 수행하는 정치운동은 확대, 발전되지 못했다. 그래서 새로운 정치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새로운 정치운동은 노동조합을 떠나서 어떤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운동이 아니라, 현존하는 노동조합 안에서, 그것을 통해서, 그것의 혁신에 의해서 전개되는 운동이다. 새로운 정치운동은 기존의 노동조합운동과 달리, 낡은 세상을 새로운 세상으로 바꾸려는 노동계급의 사회변혁운동이자 노동계급의 자기혁신운동이다. 노동계급이 새로운 정치운동에 나설 때, 노동계급 중심의 새로운 정치가 실현되는 길이 열린다.
새로운 정치운동은 노동계급이 농민, 서민과의 연대전선을 통해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고, 진보정당을 통해서 정치적 임무를 수행하는 운동이다. 노동계급은 새로운 정치운동을 통해서 연대전선과 진보정당을 이끄는 ‘기관차’가 되어 역사의 전진궤도를 달리게 된다. 이 땅의 노동계급이 한국진보연대와 민주노동당에 적극 참여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은 자기의 새로운 정치운동에 의해서, 자기의 새로운 정치운동을 통해서 대선과 총선이라는 도전에 응전해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민주노총 지도부와 현장활동가들이 합심, 협력하여 노동계급의 새로운 정치운동을 벌이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연구하고 개발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5. 민생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오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겪고있는 민생파탄이 오죽 심하면, 자본주의언론시장에서조차 민생문제를 크게 다루고 있고, 대선주자들마저 선거공약의 첫 자리에 민생문제를 올려놓겠는가. 다가오는 대선과 총선에서 민생문제를 빼놓으면 선거쟁점이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민생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입증하는 정치세력이 대선과 총선에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요즈음 권력욕에 사로잡힌 지배계급은, 그러한 전후상황을 동물적 감각으로 파악하고 제각기 민생해결책을 꺼내면서 목청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꺼내놓은 민생해결책이라는 것은 거짓말이 넘치는 사실상의 민생파탄책이다. 왜 그러한가?
평소에는 민생문제에 눈과 입을 닫아버린 채, 민생파탄의 주범인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국내자본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해왔으면서도, 선거철만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얼굴이 돌변하여 민생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떠드는 말은 거짓말 중의 거짓말이다.
자기가 집권하면 경제성장률을 몇 퍼센트로 끌어올리겠다고 외치는 대선주자들은, 경제성장이 자본증식이지 민생해결이 아니라는 사실을 교묘하게 감추면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전체를 속이는 정치사기극을 연출하는 것이다.
보수정당과 중도개혁정당은 민생문제와 무관한 경제성장률을 꺼내놓고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하면서 말싸움을 벌이고 있을 뿐, 정작 민생문제를 해결하는 방도에 대해서는 엉터리 같은 소리만 내뱉고 있다. 그들이 언론에 발표한 민생해결방도라는 것은 듣기에도 거창한 국책사업들인데, 그것은 한결같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민생문제를 해결하는 경제정책이 아니라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국내자본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국가정책이다. 민생문제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겪는 생존문제, 경제문제이므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마땅히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관점에서 모색되고 발견되고 제기되어야 한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민생문제는 선거철만 되면 중대한 정치문제로 등장하지만,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관점은 손톱만큼도 갖지 않은 보수정당과 중도개혁정당에게 그러한 민생문제를 해결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따라서 민생문제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관점을 가진 진보정당만이 풀 수 있는 문제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관점에서 민생문제를 해결하려는 진보정당이 그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어 가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한 갈래는 민주주의적으로 해결하는 길이고, 다른 갈래는 사회주의적으로 해결하는 길이다.
지금 사회계급관계가 형성된 조건이나 노동계급의 주체적 조건을 살펴보면, 민생문제를 사회주의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현 시기 민생문제는 민주주의적으로 풀 수 있으며, 민주주의적으로 풀어야 한다. 비단 대선이나 총선에서 선거쟁점으로 떠올랐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민생문제를 민주주의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최대의 쟁점이며, 전략문제이다.
민생문제를 해결하는 민주주의, 이것이 노동계급이 요구하는 새로운 민주주의이며, 진보정당이 치켜들어야 할 투쟁의 깃발이며,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연대전선이 외쳐야 할 투쟁구호이다.
민생문제란 무엇인가? 사회계급문제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생존문제라는 현상으로 드러날 때 그것을 민생문제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민생문제는 현상이고 사회계급문제는 본질이다. 사회계급문제를 본질로 하는 민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정치이념을 민주주의라 한다.
민생문제와 민주주의를 떼어놓은 채, 민주주의는 실현되었는데 민생문제는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림자만 있고 실체를 없다고 말하는 궤변이다. 노동계급의 눈으로 바라보면, 민생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회는 아직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한 사회인 것이다. 자본가와 도시중산층에게는 민생문제라는 것이 있을 수도 없으므로 그들은 민생문제로 고통을 겪는 사회에서도 자기들끼리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겠지만,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민주주의는 그들의 민생문제가 해결될 때, 오직 그 문제가 해결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민생파탄에 빠져 있는데도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자본가와 도시중산층의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는 뜻이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따라서 민생문제를 해결하려면 사회계급관계를 민주주의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사회계급관계를 민주주의적으로 변화시켜야 민생문제를 해결하는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
사회계급관계를 민주주의적으로 변화시킨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사회계급관계의 민주주의적 변화란 민주주의적 정책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이므로, 그에 관한 정책적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정책적 연구는 전문적인 것이어서 이 짧은 글에서 논하기는 힘들고, 다만 정책기조만을 간단하게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국내독점자본이 장악한 중요산업의 사적 소유와 사적 경영을 국가적 소유와 공적 경영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것을 중요산업의 국유화라 한다. 국가적 소유란 기업을 소유하는 법적 책임을 정부가 맡는 것이고, 공적 경영이란 개별기업을 경영하는 책임을 그 기업의 노동계급이 맡는 한편, 기업들과 생산부문들을 조절하는 책임을 정부가 맡는 것을 뜻한다.
둘째, 도시중산층이 소유하고 경영하는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노동계급의 생산활동을 민주주의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셋째, 제국주의독점자본의 경제침탈과 시장지배로부터 농민과 서민을 보호하고, 농지개혁을 실시하여 빈농의 생산활동을 보장해야 한다.
넷째, 영세자영업자들을 비롯한 서민의 생산활동을 보장하고 도시빈민의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
다섯째, 무상의료, 무상교육, 저가주택임대, 물가안정, 문화생활혜택을 추진하고, 투기행위와 매점매석을 근절하여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생활을 전반적으로 향상시켜야 한다.
민생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일어나 싸우는 노동계급, 그들의 응전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 그런 선거가 노동계급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살릴 것이다. (2007년 2월 8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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