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수혜자는 없고 수배자만 있는가


한-미 FTA 반대운동으로 ‘도바리’가 된 농민운동가 허연씨… “현재 16명에 이른다”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수배자들 쏟아져

▣ 광주=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영화 <오래된 정원>의 주인공인 운동권 청년 현우는 1980년대 군사독재 정권에서 수배생활을 하는 ‘도바리’다. 그는 정치적 민주화를 좀더 부르짖기 위해 경찰을 피해다녔고, 그가 뿌린 씨앗은 역사가 되어 그 시대 도망자들의 ‘범법행위’를 용서해주었다.


“아직 밖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아서”


20년이 지났다. 이즈음에도 경찰에 쫓겨다니는 도바리가 있을까. 시대와 어울리지 않게도, 노무현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반대운동 진영에서 다수의 수배자를 양산하고 있다. 한-미 FTA가 체결되고 그 여파가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나면, 역사는 ‘경제 민주화’를 외치던 21세기의 도망자들을 어떻게 평가할까.

1월31일 광주전남희망연대 대표인 허연(57)씨를 만난 곳은 광주 시내 모처의 네댓 평 되는 방이었다. 방구석에는 라면 상자와 책, 옷가지들이 차곡차곡 정리돼 있었다.

허씨가 난생처음 체포영장을 받게 된 이유는 2006년 11월22일 한-미 FTA 반대집회 때문이었다. 이튿날 신문의 어조를 평균 내보면 ‘FTA 반대 전국 난동 시위’(<국민일보>), ‘광주시청 불깡통-각목 습격’(<동아일보>)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경찰은 광주·전남 지역 시민사회 단체 연대기구인 희망연대 대표이자 한-미 FTA 협상중단 광주전남운동본부의 대표인 허씨가 이 폭력시위를 주도했다고 보고 있다. 혐의는 여럿 됐다. 특수공무집행 방해, 업무 방해,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과 도로교통법 위반….

11월22일은 광주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에 가입한 시민사회단체들의 동시다발 집회가 열린 날이었다. 허씨는 “광주 집회에는 2만 명이 몰렸다”며 “1987년 6월 항쟁 이후 최대 규모”라고 말했다. 민주노총과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시민단체에서 온 집회 참가자들은 1차 집회를 마치고 이날 저녁 광주시청으로 몰려들었다. 인간띠로 시청을 둘러싸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 일부 성난 시위대가 전경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시청 진입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00여 장의 시청 유리창이 깨지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원래 시청 진입 계획은 없었어요. FTA가 체결되면 지자체 조례도 바꾸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의서를 박광태 광주시장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답변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시청 집회를 계획한 건데, 경찰이 막았고 일부가 돌을 던졌습니다.”

사태는 진정되고, 시위대는 정리 집회로 갈음하고자 했다. 한참 집회를 하고 있는데 경찰이 대열로 치고 들어왔다. 이른바 ‘토끼몰이’였다. 일부 집회 참가자는 경찰에 쫓겨 호남대까지 3km나 뛰어 도망쳤다. 그리고 ‘불법 시위’ 주동자들에게 줄줄이 소환장이 떨어지고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희망연대 간부들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방은 ‘도바리’들의 아지트가 됐다. 방에는 체포영장이 발부된 정희성 민주노총 광주전남지역본부장, 김덕종 전농 광주전남연맹 의장도 눈에 띄었다.

허씨가 왜 수배생활을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1980년대도 아닌데, 기소유예나 집행유예로 풀려나올 것 아닌가. 이왕 맞을 매라면 빨리 맞는 것이 낫지 않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허씨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직 밖에서 해야 할 일이 많거든요. 시민사회단체 간부들에게 줄줄이 수배령을 내렸기 때문에 이들이 한꺼번에 빠지면 운동에 공백이 생깁니다. FTA 건이 정리될 때까지 (운동)해야 합니다.”

수배 중에도 집무 중

그는 수배 중에도 ‘집무’ 중이었다. 그는 이 방에서 여전히 희망연대와 운동본부 대표의 직무를 수행한다. 지역 단체와의 간담회를 주재하기도 하고, 범국본의 일정에 따라 지역의 활동을 조직하기도 한다. 그는 이날 낮에도 광주 민족예술인총연합에서 찾아온 한 간부에게 시민사회 단체의 FTA 반대운동 일정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그는 “7차 협상 일정이 나오면 또다시 구체적인 투쟁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생전 가보지 않은 ‘감옥’에 대한 내면의 공포는 없었을까. 그는 수배생활이 힘들지 않다고 털털하게 웃었다. “백일 된 외손녀를 집사람에게 놔두고 온 게 마음에 걸려요. 딸과 사위가 부천에서 맞벌이를 하는데, 지난가을에 우리에게 외손녀를 맡겼거든요. 그래서 외손녀를 함께 봐야 하는데, 이렇게 혼자 나와 있네요. (웃음) 지금은 외손녀가 가장 보고 싶어요.”

그의 덥수룩한 수염에는 두 달여 은신생활의 피로가 묻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밥도 해먹고 빨래도 한다. 가끔은 지역단체 회원들이 찾아와 삼겹살도 함께 구워먹는다고 했다. 이런 생활은 크게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신체 이동의 자유가 얽매인 ‘현실’보다 한-미 FTA를 막아야 한다는 ‘당위’가 그를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허연씨는 농민운동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그는 대학 선후배 7명과 함께 970년대 말 전남 나주로 귀향했다. 수의대 출신은 수의사를 했고 농대 출신은 농사를 지었다. 허씨는 집단농장을 운영하면서 나주농민회를 건설했고 최근에는 전농 광주전남 의장까지 맡았다. 그러면서 1980년대 수세징수 반대투쟁에서 1990년대 우루과이라운드(UR)와 세계무역기구(WTO) 반대투쟁을 겪었다. 그의 투쟁사에서 한-미 FTA는 절정이다. “한-칠레 FTA 뒤에 과수농가는 큰 타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농사짓던 품종을 다른 품종으로 변경하고, 다시 거기로 몰린 농민들은 손해 보고…. 사실 정부에는 농업정책이 없습니다. 한-미 FTA가 체결되면 농민들의 살길은 없어집니다.”

FTA 협상 1년을 맞는 지금, 허씨는 왜 정부가 한-미 FTA에 집착하는지 아직도 궁금하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자리잡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신봉자들 때문인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압력 때문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확신은 더욱 강화돼갔다. “FTA는 처음엔 우리 농민의 문제였어요. 하지만 그다음 스크린쿼터 문제로 불거져 문화예술인의 문제가 됐고, 공공성의 위기가 거론되면서 노동자와 국민의 문제가 됐습니다. 이젠 공무원노조 조합원들이 시골을 돌아다니면서 마을 교육을 하러 다녀요. 광주에서 종교인들은 기도회를 열고요.”


이미 구속된 사람은 13명


한-미 FTA 반대운동은 2000년대 들어 이례적으로 많은 수배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채희병 범국본 선전홍보팀장은 “2월1일 현재 체포영장이 발부돼 수배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16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이미 구속된 사람은 13명이다. 허씨와 함께 활동했던 류봉식 희망연대 집행위원장도 1월12일 민예총 투쟁기금 전시회에 갔다가 경찰에 구속됐다.

허씨는 “올해 3월 한-미 FTA가 체결된다고 하더라도 연내 국회 통과는 정치적 부담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라며 담배를 꺼내물었다. 그는 장기전을 각오한 듯 보였다. 그의 수배생활도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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