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옥 울산지역연대노조 조합원이 보내온 글

<font color=darkblue>다음 글은 울산과학대 청소용역 비정규직 여성노동자가 보내 온 한맺힌 글입니다. 울산지역연대노조 박선옥 조합원은 애끊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습니다. 느닷없이 울산과기대가 고용승계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7년 동안 고용이 승계됐는데 단지 노조를 한다는 이유로 계약해지된 것입니다. 한 조합원은 학교와 사측의 부당노동 행위에 대해 맨몸을 드러낸 채 항의했습니다. 이들은 절박합니다. 생활은 위기에 몰렸습니다.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재벌학교의 만행을 살펴 보십시오. 지금 울산과학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하여 보십시오. <편집자주></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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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박선옥, 49세, 울산시 중구 서동 거주)는 2000년 4월17일부터 울산과학대 교내 미화원 일을 하고 있는 울산지역연대노동조합 조합원입니다.

2000년 4월17일 두 자녀의 교육비 등 만만치 않은 생활비를 벌어 고생하는 남편을 조금이나마 돕기 위해 미화원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막상 일을 하겠다고 뛰어들었지만 학교 청소일이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 자식 같은 학생들의 교육환경을 깨끗이 하기 위해 복도, 화장실, 강의실, 실습실을 청소하는 일을 성심껏 했습니다. 또 그 외 무거운 책상을 나르는 일과 외부업무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함 없이 일하였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일을 시작한 가장으로서 작은 월급봉투에도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저희 동료들은 하나같이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문화생활이나 레저생활 같은 것은 포기하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 위로하며 즐겁게 지내는 터전이었습니다.

처음 입사당시 45만원으로 시작해 2007년 2월 현재 70만2천원의 임금을 받고 있습니다.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까지 근무합니다.

총 8명 조합원 중 5명이 개교 당시 입사해서 지금까지 일해오고 있습니다. ㄷ정보사라는 회사 소속으로 입사해 5년간 일했고 2006년 3월 청소용역업체가 00으로바뀌면서 전원 고용승계 되었습니다. 교내 청소하는 일에 대해서는 내 집 안방보다 더 깨끗이 했고 인사성도 밝아 우리 미화원들에 대한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칭찬이 자자했답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고나서 얼마 안되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선이 분명하게 그어지고 골이 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월급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점심때면 정규직 청소아주머니는 학교식당으로 향하지만 저희들은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기 위해 건물 지하 탈의실로 들어갑니다.

수업이 없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10여명이 돌아가며 당직이라는 명목으로 출근해서 일을 하였습니다. 나중에서야 당직을 서면 수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더욱이 대학 직원들은 당직을 한 번 설 때마다 3~4만원의 당직비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생리휴가나 연월차 휴가가 있는지도 몰랐고 학교 행사가 있어 늦게까지 일하게 되면 잔업수당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몇 년 동안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너무도 놀랐습니다. 그래서 2006년 7월 울산지역연대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노조에 가입하고 나서 저나 동료들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학교 직원들이 부당하게 업무지시를 내리면 항의도 하게 되었고 우리가 받아야 할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벅찬 것은 “우리도 인간이다”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조합원들은 노조에 가입하고 나서 일을 안 한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전보다 더 열심히 학교 곳곳을 쓸고 닦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조합원들은 부당한 대우에 대해 구체적으로 저항하고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2006년 10월부터는 무보수로 한 달에 3~4회 서던 당직도 없어졌고 명절 때마다 서야 했던 당직도 안서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 일과를 숨 가쁘게 마무리하고 지친 몸과 무거운 발걸음으로 보금자리에 도착하니 현관입구에 하얀 봉투가 꽂혀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았습니다. 학교쪽과 00(청소도급업체)이 계약을 해지하였으니 2월23일자로 해고되었다는 통보였습니다. 혼자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는 언니들 생각에 더 없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저와 동료들은 이렇게 물러설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학교 책임자들을 만나는 일부터 시작하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담당 처장님에게 면담을 신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습니다. 학장님을 만나려 해도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는 쫓겨날 수 없다는 생각에 학장실 앞 복도에 주저앉아 학장님이 나오기만 기다렸습니다.

퇴근 시간이 되자 학교 직원들이 모두 모여 학장님을 에워싸고 빠져나갔습니다. 저희들은 얼른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 학장님 승용차 밑에 들어가 보기도 하였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날 학교의 모든 사무실들은 굳게 잠겨 대화하자고 절규하는 저희들의 목소리에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후 학교 졸업식이 되었습니다. 졸업식에는 학교 이사장님도 오고 울산지역의 유명하고 높은 양반들이 많이 오니 저희들의 억울함을 알리는 좋은 기회다 싶어 선전전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날도 점심을 먹고 탈의실을 나오니 이미 본관 지하에는 교직원과 학생들까지 동원되어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1층으로 향하는 복도와 계단, 심지어 엘리베이터까지 통제하고 저희들을 막아섰습니다.

저희들은 “왜 막느냐?”고 항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막아서는 직원들과 학생들에 의해 1시간여 동안 지하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미화원 1명이 실신하여 구급대에 후송되어 갔습니다. 저희들은 민주노총을 비롯한 지역단체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졸업식장 주변에서 저희들의 억울한 사정을 알리는 선전전을 진행하였습니다. 현수막과 피켓을 펼치고 전단지를 나누어주며 비록 적은 인원이지만 똘똘 뭉쳐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다시한번 확인하였습니다.

어느덧 해고날짜로 통보된 2월23일이 지나고 그 다음주 월요일(2월25일)이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학교쪽과 이렇다 할 대화도 한번 못해보고 이렇게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날부터 몇 년 동안 사용하였던 지하 탈의실에 눌러 앉았습니다. 이제 죽더라도 여기서 죽자는 각오로 농성을 시작하였습니다.

저희들이 탈의실에서 농성한다는 소식에 학교직원들이 때지어 몰려와 저희들을 몰아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저희들은 죽기 살기로 직원들을 막았습니다. 어느 날은 직원들이 몰려와 탈의실 집기를 다 꺼내고 난장판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유독 우리들을 업신여기고 시건방진 행동을 일삼던 직원이 탈의실에 들어와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퍼부으며 난동을 부렸습니다. 급기야 미화원 1명의 발을 밟아 피멍이 시퍼렇게 들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가진 자들의 횡포에 시달려야 하는 우리네 맘이 너무나 서러워 목 놓아 통곡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각 단체는 물론이고 언론사에 기사화되어 퍼져나가자 많은 지역 동지들이 방문하여 밤낮을 가릴 것 없이 연대해 주겠다고 나섰습니다. 그 동지들을 보면서 저와 지부장 언니는 감격하여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손수건이 흠뻑 젖기도 하였습니다.

그럭저럭 지하 농성장이 자리를 찾아 갈 즈음 3월7일 아침이 되자 또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지난번 난동을 부렸던 그 직원이 지하로 내려와 막무가내로 농성장 집기를 부수고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후 학교 전 직원들이 몰려 내려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우리 미화원들과 지역 동지들이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수적 열세에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성동지들이 먼저 건물 밖으로 끌려났습니다. 저희들은 소금과 물을 뿌리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급기야 순간적으로 알몸으로 저항하면 몰려들지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 우리는 거의 알몸으로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학교 직원들은 이에도 아랑곳없이 막무가내로 들이닥쳤습니다.

한 직원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저를 잡아먹을 듯한 눈빛이 너무도 무서웠습니다. 그때 학교직원들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한명씩 끌려 나갔습니다. 한 조합원은 엘리베이터에 갇힌 채로 머리채가 뜯겨져 머리 한가운데에 머리카락이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알몸인 채 짐승 같은 직원들에 의해 끌려 나가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본관 현관문으로 쫓겨나온 저희들은 ‘7년 동안 일해 온 대가가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에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목 놓아 울었습니다. 저희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많은 지역 동지들이 찾아와 위로해 주었습니다. 본관 앞으로 쫓겨난 후 총학생회 간부라는 학생들 20여명이 몰려와 “공부에 방해되니 학교에서 나가달라”고 했습니다. 7년 동안 이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는데 학생들이 몰려와 나가달라고 하니 너무도 서러웠습니다.

학교직원들의 난동이나 학생들의 무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은 이제 더 이상 물러 설수 없다는 생각에 쫓겨난 본관 현관 앞에서 농성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지역 동지들 덕분에 차가운 바닥에 한 올 비닐이라도 깔 수 있었고 밤이면 바람이라도 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학교 직원들과 학생들의 행동은 날로 더해갔습니다. 3월9일 총학생회는 수업중인 학생들을 다 동원하여 본관 앞 농성장 앞에 몰려와 “물러가라”고 외치고는 사라졌다가, 잠시 뒤에 또 몰려와서 “물러가라”를 외치고 사라졌습니다.

저도 자식 키우는 부모지만 내 자식이 저렇게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가진 자들의 편에 서서 없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까 겁이 났습니다. 그때 뒤에 서있는 철없는 학생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고 있었습니다. 내 자식이 저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학생들이 물러가고 난 후 과학대노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저희들을 내쫓았던 짐승들이 나왔습니다. 수십 명이 몰려나와 “물러가라”를 외쳤습니다. 노조에 가입되었다는 이유로 해고 당하고 짐승처럼 쫓겨났는데 노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몰려나와 우리보고 물러가라고 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예전에 들은 어느 직원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이사장은 민주노조 싫어한다 아인교!”

지금도 지역 동지들이 마치 자기들 일처럼 옆에서 도와주고 계십니다. 지부장 언니는 7년 동안 몸담고 마음담아 열심히 일한 일터의 학교 직원이 내&#51922;았지만 우리를 위해 찾아주시는 분들이야말로 맘의 천사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이 쉰에 노조 한다는 이유로 쫓겨난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우리 미화원 8명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직원들의 횡포와 총학생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희들이 겪은 일을 시작으로 비정규직의 억울함을 조금이나 해소할 수 있다면 끝까지 투쟁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우리 미화원들의 일에 관심을 가져 주시고 지켜봐 주시는 것에 힘을 내어 기필코 이기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태양이 되고 싶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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