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정 민주노총 제주본부 교육선전국장

일제 패망과 함께 찾아온 해방은 일제의 가혹한 착취와 수탈에 고통받던 제주도민들에게는 환희와 감격 그 자체였다. 감격스런 해방을 맞은 도민들의 가슴 속에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는 희망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도민들의 감격과 새 세상 건설에 대한 희망도 잠시뿐이었다. 친일파는 여전히 득세하고, 엄청난 흉년에 굶어죽는 도민들에게 미곡수집령을 내리는 등 이 땅을 점령한 미군정 정책은 일제의 그것과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도민들의 희망이 미군정에 대한 분노와 저항으로 바뀌면서 도민들과 미군정간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947년 3월1일. 3·1절을 기념해 3만명 도민들이 관덕정에 모여 기념집회와 시위를 하는 도중 경찰 발포로 어린이를 포함한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에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3월10일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노동자, 경찰, 공무원까지 참가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을 벌여 미군정에 맞서게 된다. 그러나 ‘발포책임자 처벌’ 등 정당한 요구를 하는 도민들에게 돌아온 것은 미군정의 대대적 탄압뿐이었다. 게다가 1948년 미군정은 남한만의 5·10 단독선거 강행을 결정하고 노골적으로 분단국가 수립음모를 드러냄으로써 4·3항쟁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말았다.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한라산과 제주도 전역에 퍼져있는 오름에서 동시에 횃불이 타올랐다. 그리고 이 횃불을 신호로 제주도민들은 ‘남한단독정부반대’,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촉구하며 무장봉기에 나섰다. 최초의 횃불이 오른 1948년 4월3일부터 봉기에 나섰던 무장대가 토벌대에 의해 완전히 소탕된 1954년까지 장장 7년에 걸쳐 국가권력에 의한 대학살극이 자행됐다. 이 과정에서 적게는 3만명에서 많게는 무려 8만명에 가까운 무고한 제주도민이 희생당했다.
이처럼 제주도민들의 4·3항쟁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진행되던 분단음모를 분쇄하고 완전한 민족통일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또 일제와 전혀 다를 바 없이 민중수탈정책을 펼친 미제국주의에 저항한 반제투쟁이었다. 그리고 해방 직후 제주도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민중이 주인되는 새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도민들의 의지가 표출된 투쟁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주도민들의 이러한 역사적 투쟁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총칼아래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잘못된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미국은 59년 전과 마찬가지로 한미FTA라는 외피를 둘러쓴 2007년판 경제침탈을 자행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 MD전략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는 제주도해군기지 건설문제는 해방 전 일제 옥쇄작전으로 몰살 위기까지 몰려야했던 제주도민들에게 절망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러한 끔찍한 현실 속에서 노동자·민중들에게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다. 미국 침탈을 막아내고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을 지켜내기 위해, 제주도를 전쟁의 섬이 아니라 평화의 섬으로 건설하기 위해,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분단체제를 끝장내고 노동자·민중이 주인되는 새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이제는 일어서야 할 때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계승하고자 하는 4·3항쟁의 현재적 의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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