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 회원이 허세욱 선생님의 쾌유를 빌며

<font color=darkblue>이 글은 2007년 4월 4일 저녁 8시에 (평통사 회원으로도 활동했던)허세욱 회원이 입원해 있는 한강성심병원에서 열린 평통사 주최 촛불집회에서 낭독한 글입니다. 민주노총 자유게시판에 게재된 전문을 옮겨 소개합니다.<민주노총 편집국></font>

[사진1]
허세욱 회원님께

평소에 부르던 대로 선생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허세욱 선생님..

저는 지금 선생님이 계시는 영등포 한강성심병원 앞에서 평통사 회원들과 선생님의 쾌유를 비는 촛불을 들고 있습니다.

지금 선생님의 아픔과 고통이 어느 정도일지 저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병상에 누워계실 선생님을 떠올릴 때마다 저의 가슴 한 편이 아파옵니다.

4월 1일 이후,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선생님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착각에 문득 놀라곤 합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선생님의 분신에 관한 소식을 접하면 지금 이 현실이 꿈이었으면... ‘내가 잠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가만히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가장 최근에 선생님을 뵌 것은 3월 30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한미FTA반대 촛불문화제였습니다. 그 날 선생님은 1인 시위 피켓을 몸에 매고 계셨습니다. 1인 시위 피켓은 큰 우드락에 한미 FTA의 문제가 무엇인지 선생님께서 직접 손으로 적으신 것이었어요. 직접 피켓까지 준비 해 오신 모습에 한미 FTA반대를 위한 촛불 문화제에 나오면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제 자신이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선생님의 소식을 듣고 선생님의 지난 활동사진들이 필요하다는 주변의 부탁에 선생님의 사진을 찾아보았습니다. 2002년도 평통사가 여중생 투쟁에 앞장설 때부터 저희와 함께 하셨고 2004년도에 평통사에 가입하신 선생님의 사진을 찾는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여중생 추모집회, 김선일씨 추모집회, 평택 미군기지 확장을 막아 나서기 위해 했던 선전전을 비롯한 투쟁, 서울 평통사 노동분회 모임을 비롯한 각종 회원행사....

참여를 많이 하셨는데도 사진이 많지가 않았습니다. 사진 속에서도 거의 뒤편에 계셔서 선생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사진을 찾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한결같이 뒤에 서 계셨다는 사실을...

평택에서 강제로 미군기지를 확장하겠다고 들판과 마을에 수많은 공권력이 쳐들어올 때, 몸을 사리지 않고 앞에 나서서 싸우시던 기억이 납니다.

작년 5월 4일, 대추분교가 무너지고 그 아름다운 들녘에 철조망이 쳐질 때 평통사 회원들과 함께 싸우다가 연행까지 되셔서 고생을 하셨지요. 연행에서 풀려나오신 이 후에 괜찮으신지 전화를 드리니 몸을 다쳐서 한의원 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있다는 말씀에 깜짝 놀랐습니다.

평통사 월례집회나 투쟁 일정이 잡힐 때마다 전화연락을 드리는 제가 귀여우셨는지, 연락을 할 때마다 500원씩 주겠다고 하셨지요. 그리고는 참여하실 때마다 500원 짜리 동전을 건네주셨어요. 그 동전을 받고 500원짜리 아르바이트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저를 보고 웃으시던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택시운전을 하시다가 평통사 사무실 근처에 오시게 되면 음료수 한 병을 사들고 조용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던 선생님 얼굴도 떠오릅니다.

노동 분회 모임이 있을 때마다 참석하시려고 노력하시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설사 모임을 하는 날이 택시 운전을 해야하는 날이어도 잠시 짬을 내어 들러서 인사를 건네시던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제게 선생님이 아니라 동지라고 부르라고 하시던 허세욱 선생님...

항상 성실하게 생활하시며 우리 회원들과 함께할 땐 조용히 뒷자리를 지키시고 투쟁의 현장에서는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섰던 허세욱 선생님

꼭 일어나셔야합니다. 지금의 아픔과 고통 이겨내시고 다시 일어나셔야 합니다.

선생님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다시 돌아오실 거라 믿습니다.

힘내세요. 허세욱 선생님.

2007년 4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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