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묘역과 신묘역 등 보수와 진보의 새로운 갈림길

5.18 광주 르뽀_변해가는 광주의 현장
구묘역과 신묘역 등 보수와 진보의 새로운 갈림길

‘광주 도시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 광주역에 도착한 시각 19일 오후2시10분경. 언제나 그렇듯 광주역을 드나드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역사 바깥에서 북소리가 들려오지만 일정을 위한 발걸음엔 여념이 없다.
별로 크지 않은 광주역사 앞, ‘자본의 FTA, NO!’라는 대형걸개그림이 한눈에 들어온다. ‘5월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 및 문화제’ 준비에 한창이다. 60명의 풍물패들이 대회를 알리는 울림이 이미 시작됐다.
“14일부터 7보1배로 망월동 광주묘지에서 구도청 YMCA까지 완주했지만 망월동에 대통령이 왔다고 경찰들 수백 명이 와서 우리를 감금했다”는 광주시청 해고노동자의 호소가 대회의 성격을 알리고 있었다.
저녁7시경 1천여명의 노동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전야제 행사가 시작됐다. “광주는 어렵고 포기하고 싶을 때 오게 되는 곳이다”며 “이제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새롭게 실천해나가자”는 이석행 위원장의 대회사가 힘차게 들려온다.
점점 어둠이 드리우는 참가자들 뒤편에 대조적으로 전시된 사진들이 눈에 띤다. 80년 5월 광주도청과 07년 3월 광주시청의 모습이 그것이다. 80년 5월 국군에 의해 끌려가는 남성들의 모습에, 07년 3월 시청직원에 끌려가는 알몸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대비돼 있다. 들것에 의해 실려 가는 시민군의 시신모습 역시, 07년 3월 앰블런스용 운반기구에 의해 실려 가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가 대조적이다. 넋 나간 모습으로 당시 오열하는 가족들의 모습에는, 울음을 터뜨리며 마이크 앞에 선 동료아주머니의 현실이 담겨져 있다.
어느덧 전야제 행사 속에서도 사진촬영을 하며 서로 웃는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의 모습도 눈에 띤다. 밤 9시10분경 도청까지 행진하기 위해 분주하게 이동하는 집회군중들. 하얀 제복을 입은 광주 경찰들의 교통 정리하는 모습도 비교적 여유가 있다.
야간행진은 야간집회와 가두행진이 함께 진행되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지만 이곳 광주에서나 가능한 집회의 모습이다. 풍물패들의 활보와 장단이 밤의 도심을 두드린다. 비교적 차분한 교통의 흐름과 질서가 함께 응해주고 있다. 서울이라면 감히 엄두도 나지 않을 모습이다. 집회시위문제로 ‘시민 행복추구권’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역에서 구도청까지 3Km 정도 되는 야간행진이 이어진다. 광주시내 야간의 거리는 비교적 한산한 편이다. 별로 밝지 않은 대도시의 야간시내가 눈에 띤다. ‘80년 당시의 어둠과 별로 다르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간다. 구호와 노래, 선무방송이 요란한 것 말고는 거리는 비교적 한산하고 조용하다. 차량의 흐름도 별로 눈에 띠지 않는다. 손을 흔들어주는 광주시민도 간혹 눈에 띤다. 27년의 세월 속에서도 현재의 진실을 알고 있는 듯, 무엇이 문제인지 왜 시위대들이 지금 이 시간에 거리를 활보하는지를 아는 듯이 말이다.
밤 9시 45분경 어둠에 반전이 시작된다. ‘횃불’이 점화된다. 횃불로 광주 시내의 흐릿한 어둠이 가신다. 횃불의 열기가 온몸으로 후끈 느껴진다. 수백 개의 횃불이 장관을 이룬다. 중국에서 작년 8월에 이곳에 왔다는 중국어 강사 여성 2명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광주의 역사에 대해 설명을 듣고는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무섭다”면서 “중국에서는 이런 모습이 없다”는 말을 하며 신기해하는 모습이다.
밤10시20분경 ‘횃불야간행진’이 마무리됐다. 광주시내 택시기사 아저씨 한분은 “5.18기간에는 조용하게 지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기리는 날인데 너무 소란스러운 것 같다”고 말했다. 광주시민들의 의식도 27년 세월의 무게감을 인내하고 있는 듯했다.
순간 어제 전야제 행사에 취재차 만난 전남대생(30세)의 얘기가 떠올랐다. 그는 ‘광주시민들의 정치의식이 높다’는 데 대한 의견에 이의를 달았다. “당시 5.18때는 ‘독재타도’라는 명확한 기준이 있어서 하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구호를 외치면 동의를 얻었던 시절이었다”면서 “과거 한나라 대 반한나라당 구도가 있었지만 지금은 이해관계에 따라 엇갈리는 복잡한 사회가 됐고, 그만큼 진보가 몰표를 얻을 수 있는 시절은 아니다”고 말했다. 즉 민주대 반민주 구도의 역사 속에 진보와 보수 구분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얘기로 들렸다. 예컨대 비운동권 학생들의 경우에도 민주적 의식이 높은 친구들도 꽤 많이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예컨대 “공무원을 지원하는 청년들의 경우 5.18유공자들 때문에 형평성의 차원에서 거부감도 드러나고 있다”며 “취업이 어려운 조건 속에서 5.18유공자의 자녀들이 우선시 되고 있는 현실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5.18이후 현실에 대해 꼭 긍정적인 시선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5.18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기준이 모호하고 혼재돼 있다”며 “‘어떤 것이 진보인가’ 하는 기준이 해명돼야 할 문제”라고 그는 지적했다.
20일 아침8시50분경 조선대에서 이동한 망월동 구묘역에 광주시청 비정규직 노동자 20여명이 “비정규직 폐기하라” “광주시는 사과하라”는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순례군중을 맞이하고 있다. 이곳 망월동 묘역에는 아침부터 참배하는 순례객들로 분주하다.
이미 둘러본 한 연맹 채용성원이 “이곳 망월동 묘역에 노동열사들의 묘지가 생각보다 별로 보이진 않는다”고 말했다. 이곳 구묘역에는 5.18 당시 160여명의 희생자가 묻혀 있고, 5.18 정신계승 차원에서 이후에 묻힌 36명의 노동열사의 묘가 36개 있다는 대학생 가이드의 설명이 들렸다. 이 중에서 이름과 사진이 없이 비어있는 데는 시신은 찾았는데 신원은 모르는 희생자들이라고 했다.
반면 10시 신묘역에 도착, ‘민주의 문’을 들어서자 양쪽으로 분수의 물결이 순례객을 맞고 있고 드넓은 광장과 광활한 조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왜 구묘역과 신묘역으로 나뉘어 있는지, 또 양쪽에서 추모를 왜 따로 하고 있는지 의아해졌다. 박주승 전남본부 사무처장은 “양쪽으로 참배가 나뉘어 이뤄지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오후 4시15분부터 ‘5.18국민대회’ 참가자들은 전남대까지 80년 당시 항쟁의 구간을 행진했다. 일부 박수를 쳐주는 시민들, 유인물을 궁금하게 받아드는 시민들, 서울처럼 분주하고 바쁜 모습들이 없어 보이는 시민들의 모습이 역시 눈에 띤다.
오후5시45분경 전남대에 도착 각 단체별로 귀갓길에 오른다. 한상렬 진보연대 공동대표는 “피의 발자국을 다시 밟음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길을 열겠다는 다짐으로 길을 걸어왔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비록 열려있고 길지 않은 길이지만 그 길에는 새로운 길도 함께 했었다는 위안으로 하루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강상철 기자

=========================================================================

[수정본]

'5.18 도시, 광주'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갖고 광주역에 도착한 건 19일 오후 2시10분경. 언제나 그렇듯 광주역을 드나드는 시민들 발걸음이 분주하다. 역사 바깥에서 북소리가 들려오지만 시민들은 저마다의 일정을 위한 발걸음엔 여념이 없다.

현대화된 광주역사 앞, ‘자본의 FTA, NO!’라는 대형 걸개그림이 한눈에 들어온다. ‘5월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 및 문화제’ 준비가 한창이다. 60명의 풍물패들이 대회를 알리는 큰울림을 시작했다.

“14일부터 7보1배로 망월동 광주묘지에서 구도청 YMCA까지 완주했지만 망월동에 대통령이 왔다고 경찰들 수백 명이 와서 우리를 감금했다”는 광주시청 해고노동자의 호소가 대회의 성격을 알리고 있었다.

저녁7시경 노동자 1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전야제 행사가 시작됐다. “광주는 어렵고 포기하고 싶을 때 오게 되는 곳”이라며 “이제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새롭게 실천해나가자”며 이석행 위원장의 대회사가 쨍쨍하다.

어둠이 발목까지 차오르는 가운데 참가자들 뒤편에 전시된 사진들이 눈에 띤다. 80년 5월 광주도청과 07년 3월 광주시청의 대조적인 모습이 그것이다.

80년 5월 국군(계엄군)이 끌고가는 남성들 모습, 그리고 27년 후 07년 3월 시청직원이 끌고가는 알몸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 모습을 담은 사진이 대비돼 있다.

들것에 실려 옮겨지는 시민군 모습과, 07년 3월 앰블런스 운반기구에 실려가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오열하는 가족 모습과 울음을 터뜨리며 마이크 앞에 선 노동자 아주머니를 담은 이 3장의 사진 속에 오늘 광주의 모습이다.

전야제 행사를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면서 서로 웃음을 아끼지 않는 기아자동차 노동자들 모습이 눈에 띤다. 밤 9시10분경 도청까지 행진하려는 군중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하얀 제복을 입은 광주지역 경찰들이 교통 정리하는 모습이 여유있어 보인다.

야간 집회와 가두행진이 광주에서는 한번에 벌어지는 셈이다. 서울에서는 어느 하나 쉽지 않은 일이다. 이곳 광주에서나 가능한 모습이다. 서울같으면 단박에 '교통체증'이니 뭐니하며 집회시위를 문제삼아 '시민 행복추구권' 논란이 벌어지기 일쑤일텐데.

광주역에서 구도청까지는 약 3Km 정도. 광주의 밤 거리는 비교적 한산하다. 도시 가로등이 밝아 보이지 않아서인지 되레 밤의 느긋함마저 느껴진다.

'80년 당시의 어둠과는 또 어떻게 달랐을까?'

2007년 5월18일, 광주의 밤은 구호와 노래, 선무방송이 요란한 것 말고는 거리 풍경은 한산하고 조용하다. 27년의 세월 속에서도 현재의 진실을 알고 있는 듯, 무엇이 문제인지 왜 시위대들이 지금 이 시간에 거리를 활보하는지를 아는 듯이 말이다.

밤 9시 45분경 어둠에 반전이 시작된다. ‘횃불’이 점화된다. 횃불로 광주 시내의 흐릿한 어둠이 가신다. 횃불의 열기가 온몸으로 후끈 느껴진다. 수백 개의 횃불이 장관을 이룬다.

작년 8월, 중국에서 광주로 왔다는 여성 중국어 강사 2명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광주 역사에 대해 설명을 듣자 이들은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무섭다, 중국에서는 이런 일이 없다”는 말을 한다. 이방인의 눈에 스며드는 낮선 광주의 아픔을 이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밤10시20분경 ‘횃불야간행진’이 마무리됐다. 광주시내 택시기사 아저씨 한분은 “5.18기간에는 조용하게 지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기리는 날인데 너무 소란스러운 것 같다”고 말했다. 광주시민들의 의식도 27년 세월의 무게감을 인내하고 있는 듯했다.

순간 어제 전야제 행사에 취재차 만난 전남대 학생(30세) 얘기가 떠오른다.

그는 ‘광주시민들의 정치의식이 높다’는 데 대한 의견에 이의를 달았다. “당시 5.18때는 ‘독재타도’라는 명확한 기준이 있어서, 그걸로 하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구호를 외치기만 하면 동의를 얻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면서 “과거 한나라 대 반한나라당 구도가 있었지만 지금은 이해관계에 따라 엇갈리는 복잡한 사회가 됐고, 그만큼 진보가 몰표를 얻을 수 있는 시절은 아니다”고 말했다.

"민주대 반민주 구도의 역사 속에 진보와 보수 구분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얘기로 들린다. "비운동권 학생들같은 경우에도 민주의식이 높은 친구들도 꽤 많이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예컨대 “공무원을 지원하는 청년들의 경우 5.18유공자들 때문에 형평성 차원에서 거부감도 드러나고 있다”며 “취업이 어려운 조건 속에서 5.18유공자 자녀들이 우선시 되고 있는 현실 때문”이라고 말했다. 5.18이후 현실에 대해 꼭 긍정적인 시선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또 “5.18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기준이 모호하고 혼재돼 있다”며 “‘어떤 것이 진보인가’ 하는 기준이 해명돼야 할 문제”라고도 지적했다.

20일 아침8시50분경 조선대에서 이동해 망월동 구묘역에 선 광주시청 비정규직 노동자 20여명이 “비정규직 폐기하라, 광주시는 사과하라”는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순례군중을 맞이한다. 이곳 망월동 묘역의 아침은 죽은 자를 찾는 산자의 순례로 가득하다.

묘역 참배를 마친 한 연맹 성원이 “이곳 망월동 묘역에 노동열사들 묘지가 생각보다 별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구묘역에는 5.18 당시 희생된 160여 명의 넋들이 묻혀 있고, 5.18 정신계승 차원에서 이후에 묻힌 노동열사 묘 36기가 있다는 대학생 안내원 설명이 들린다. 이들 중 이름과 사진이 비어있는 무덤이 있다. 시신은 찾았는데 신원은 알 길이 없는 희생자들이라고 한다.

이날 아침 10시경 신묘역, ‘민주의 문’을 들어서자 양쪽에 버티고 선 분수가 순례객을 맞는다. 넓게 열린 광장과 조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기자는 "왜 구묘역과 신묘역으로 나눠졌는지, 또 양쪽에서 왜 추모를 따로 하는지" 의아해졌다. 박주승 전남본부 사무처장은 “양쪽으로 참배가 나뉘어 이뤄지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오후 4시15분부터 ‘5.18국민대회’ 참가자들은 금남로에서 전남대까지 80년 당시 항쟁의 구간을 행진했다. 일부 박수를 쳐주는 시민들, 유인물을 궁금하게 받아드는 시민들, 서울처럼 분주하고 바쁜 모습들이 없어 보이는 시민들의 모습이 역시 눈에 띤다.

오후5시45분경 전남대에 도착 각 단체별로 귀갓길에 오른다. 한상렬 진보연대 공동대표는 “피의 발자국을 다시 밟음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길을 열겠다는 다짐으로 길을 걸어왔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비록 열려있고 길지 않은 길이지만 그 길에는 새로운 길도 함께 했었다는 위안으로 하루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강상철 기자/노동과세계>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노동과세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