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의학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 조직쟁의국장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의 ‘마스코트’이자 대구지역 노동자들의 ‘분위기 메이커’하면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이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바로 노의학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 조직쟁의국장(38세. 경북 안동 출신). 사람 좋은 웃음에 서글서글한 눈매가 인상적이다.
노국장은 지난 92년 군대 제대 후 대구시 비산동 소재 염색공단내 태경물산이라는 염색공장에 입사해 원단 염색 후 건조시키는 기계인 ‘텐타’를 조작하는 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93년 노조 임원선거에 부위원장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자 당시 상급조직이었던 한국노총을 탈퇴했다. 전노협 지역하부조직이었던 대노협과 노민추 활동을 통해 조직을 민주노조로 바꿔냈다.
95년 민주노총이 건설되는 과정에 몸담았고 97년 노개투를 전개하면서 대구지역 선봉대장으로 활약했다. 전국 파업에 동참하는 동시에 단위노조 선봉대를 꾸려서 활동했다. 98년 조합원들을 탄압하는 사측 관리자들 행태에 분개해 젊은 혈기로 저항하다 해고됐다. 2000년 대우자동차정리해고분쇄 대구경북 민중대회 시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고 만기출소했다.
“기업별노조의 한계를 느껴 업종·지역별노조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당시 대구 섬유노동자들을 조직해 섬유지역노조를 거의 완성해가던 시기에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출소하고 보니 물거품이 돼 있더군요. 얼마나 안타깝던지...”
2001년 9월 민주노총 대구본부 미조직특위 비상근 상황실장을 맡아 2003년 5월 대구지역일반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조합원 38명을 모아 초대위원장을 맡았고 이듬해 말 조합원 규모를 4백명으로 늘렸다. 1년 반 만에 열배 넘는 조직으로 키운 셈이다. ‘조직화 귀재’라는 칭찬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그는 2005년 1월부터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 조직쟁의국장을 맡아 지역 조직화 사업에 임하고 있다.
16년째 노동운동을 해오면서 가장 소중한 것을 묻자 노국장은 얼른 한 사람을 떠올린다. 사람을 좋아하는 그인 만큼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을 가장 큰 매력으로 꼽는다. “저보다 12살이 많은 학출 선배였습니다. 사업장이 달랐지만 주야맞교대로 12시간씩 일한 후 피곤한 중에도 술을 사주시며 ‘노동자의 삶을 살아라’고 교훈과 힘이 되는 말씀을 많이 해 주셨습니다.” 노국장은 진로를 고민하고 미래를 계획할 때 선배노동자를 찾아가 상담도 하고 때로는 하소연도 했다. 그 이성해 선배와는 요즘도 가끔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옛날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노의학 국장은 대구본부에서 맡은 일이 자신과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사무직보다는 외근을 주로 하며 사람들을 만나는 사업이 좋단다. “노동자들을 만나 신생노조를 만들고 비정규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것이 보람됩니다. 노동자들은 건강합니다.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그들 모습이 좋게 느껴집니다.”
엄혹한 현장에서 탄압받는 조합원들을 만나면 안타깝지만 힘도 많이 얻는다. 옛날에는 집회 후 일상적으로 ‘뒷풀이문화’가 있어 그날 투쟁을 평가반성하는 장이 마련됐는데, 요즘은 그런 것이 줄어 제일 아쉽단다. 그러다보니 현장 조합원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어졌다는 것. 노국장은 행사를 마치면 무조건 “뒷풀이”를 외친다.
“우리 노동운동은 활동가들이 선거에 매몰되고 자리욕심에 연연한 것이 큰 문제입니다. 노동자대중 속으로 들어가자고 하면서 ‘위원장 한 사람이 조직국장 할 수 있나?’ 그런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위원장 임기 마치면 현장 조합원으로 돌아가 활동할 수 있는 마음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루 24시간 줄창 뛰어다니며 대구지역 3만명 조합원들을 관장하려니 바빠서 아직 결혼을 못했단다. 그래도 노의학 국장에게는 하루하루가 봄날이다.
홍미리 기자 gommir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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