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성, 윤리보다 자본과 힘의 논리가 지배

장투사업장⑨ 합의사항 불이행 관행
도덕성, 윤리보다 자본과 힘의 논리가 지배

‘약속은 지키기 위해 있다’는 것은 상식쯤에 속한다. 특히 사회적 약속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노와 사의 합의사항은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노사간 ‘합의’는 휴지조각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하다. 사용자들은 여전히 ‘불이행’의 관행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법원의 판결이 있어도 이행하지 않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합의가 번복되면 불신의 골로 빠져든다. 약자인 노동자들은 합의사항 하나에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장기투쟁의 극한 양상으로 변질된다.
기륭전자, 르네상스호텔 등 불법파견 시정명령에 대한 사측의 불이행은 이미 오래된 관행쯤으로 여겨진다. 부당해고 판정 불이행 역시 마찬가지다. 하이텍알씨디코리아의 경우 지노회와 중노위에서 부당해고 복직 명령이 떨어졌지만 회사는 막무가내다. 오히려 현장복귀 조합원들에 대한 감시 통제와 차별행위를 일삼는 등 각종 부당노동행위로 일관하고 있다.
현대하이스코의 합의위반 경우는 가장 단적인 사례다. 현대하이스코는 노와 사에다 광주지방 노동청장과 순천시장까지 가세한 일명 ‘노사정’ 합의사례다. 하지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노골적으로 위반하는 결과가 빚어졌다. 1차 확약서 위반은 구체적인 입사일자를 표기하지 않은 허점을 이용한 경우다. 그리고 2차 합의서 위반은 입사시기가 아니라 채용에 있어 경비업무로 배치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단체행동권이 보장되지 않는 경비직에 배정된 데다 해고전의 임금과 비교하면 월 평균 30~40여만 원 정도의 임금 하락이 불 보듯 뻔해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이다.
법원의 판결에 수천만원의 벌금이 집행돼도 꿈쩍 않는 사용자도 있다. 금속노조 산하 이젠텍의 경우 노조의 가처분에 대해 ‘교섭에 응하라’는 법원의 판결이 내려졌지만 사측은 불이행을 고집하고 있다. 결국 7천여만원의 벌금을 집행당하면서 최근 노사간에 면담이 오고갔지만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다. 정인식 이젠텍 수석부분회장은 이와 관련해 “‘복수노조 허용’이라는 문제의식과 ‘원청에서 욕 먹는다’는 것 때문에 사측이 계속 고집하고 있는 것 같다”며 “평택지원에서 사측의 이의신청을 기각한 이후 고법에서 현재 10개월 째 계류 중인데 대법원까지 가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어 조합원들이 장기간 버티는 데 상당한 부담”이라고 전했다.
코오롱의 경우 ‘강제 구조조정 없다’는 노사합의가 파기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급기야 노조가 무력화의 길로 들어선 경우다. 합의하는 과정에서 코오롱 조기퇴직 900여명, 임금 15% 반납 등 구조조정에 대한 노사합의를 했지만 돌아온 것은 보름 뒤 노사합의 파기였다.
최일배 코오롱노조 위원장은 “사용자들끼리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고 공공연하게 떠벌리고 있다”며 “억지인 줄 알면서도 지금 이 시국에서 노조를 억누르지 못하면 바보라는 인식이 사용자들한테 팽배한 것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합의사항 불이행 문제는 최근 사회적 정서와 맞물려 있다는 게 주변의 관측이기도 하다. 최 위원장은 “과거에는 사용자들이 도덕성, 윤리 등을 두려워했는데 이제 사회 전반의 정서가 ‘자본’, ‘경쟁력’ 등을 우선 두둔하는 정서가 되다보니 합의정신이 무시되는 것 같다”며 “부당노동행위나 단협위반 해서 고소고발 되더라도 벌금 2천만원 내면 그만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이 부당노동행위를 묵인하는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노사간의 합의파기 문제는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문제로 해석된다. 전국건설노조의 경우 수천 개의 현장에서 간혹 합의파기 문제로 현안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투쟁으로 복원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영철 전국건설노조 조직국장은 “합의사항 파기문제를 결과로 놓고 본다면 사용자들이 처음부터 협약서를 안 쓰려고 했을 것”이라며 “힘의 논리에 따라 사용자들이 노조에서 힘이 약해 보인다 싶으면 합의사항을 파기해서 무력화시키려는 모습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불이행을 되돌리는 데는 몇 개월간 강도 높은 투쟁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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