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협 무시는 87년 이전으로 되돌아가라는 것”

장투사업장⑩ 단체협약은 법도 아닌가?
“단협 무시는 87년 이전으로 되돌아가라는 것”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조가 활성화 붐을 타고 속속 결성됐다. 이 같은 현상은 88년에도 이어졌다. 당시 5,200여개 노조가 결성됐다. 그 해 6월 120명의 노동자가 스크럼을 짜고 공장 앞마당에 드러누웠다. “노조를 인정하지 않으면 여기서 한발 짝도 나가지 않겠다”며 결사항전의 자세로 버텼다. 결국 단체협약이 체결되고 노조가 인정됐다.
가산디지털단지(옛 구로공단) 금속노조 산하 ‘천지산업’의 얘기다. 이토록 20년 역사 속에서 고통을 안고 만들어진 ‘단체협약’이 사용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단협 해지나 무단협 통보로 어이없게 장기투쟁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천지산업의 경우 재작년 11월 사용자는 무단협을 선언했다. 이후 작년 5월 단체협약 해지 통보를 해온 것이다. 작년 세종병원 사태도 단협 해지통보가 발단이었다.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역시 일방적인 단협 해지와 부당노동행위로 장기투쟁에 내몰리고 있는 상황이다.
단체협약은 1년 농사와도 같다. 그만큼 노동조합은 단체교섭을 통한 단체협약 체결에 매진하게 된다. 갱신기간이 2년일 경우 때로는 2년 만에 단체협약을 성사한다. 쟁의행위도 단체협약 체결을 위해 존재한다. 노사 간 대립의 극한형태인 파업도 단체협약 문구 하나 가지고 진행되는 경우가 흔하다. 예컨대 ‘협의’냐 ‘합의’냐 하는 문구 하나 가지고 대립되는 경우도 생긴다. 단체교섭 기간이 짧게는 1개월에서부터 길게는 1년을 넘기는 경우도 있다. 모든 행위와 갈등이 단체협약 문서 하나로 집약되는 것이다. 이처럼 단체협약은 노사가 힘들여서 만든 법이다. 결국 법을 쉽게 어긴다는 것은 단체교섭의 전 과정을 무시하는 것이고, 혼란을 자초하는 중대한 범죄에 해당할 수 있다.
민주노총 권두섭 변호사는 이와 관련해 “단협 해지는 용역깡패나 직장폐쇄, 손배가압류 등처럼 동일시할 수 있을 만큼 아직 일반화됐다고 보긴 힘들지만 손배가압류가 과거에는 없었다가 최근 몇 년 동안 일반화되면서 심각해진 것처럼 단협 불인정 문제도 이제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최근 노동기본권이 후퇴되고 비정규직이 양산되면서 조직력이 약화된 상황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체협약은 통상 노사 간의 관계를 규정한다. 단협 무시는 87년 이전 노조가 없던 시절로 되돌아가라는 얘기와 일맥상통한다. 권 변호사는 “사용자가 합의해서 만들어진 단체협약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결국 노조를 부정하고 노사관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고 잘라 말했다.
천지산업의 경우 특례병노동자들이 많아 조금만 늦게 출근해도 기합과 얼차려가 다반사였다. 특례병들에게 가해지는 인격적 모독과 감시 통제를 노조간부들이 해결해 줄 수 있었다. 유현재 천지산업지회 사무장은 “부서배치전환 시 당사자의 의사를 묻게 만들고, 근로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노조와 사전 협의하게 하는 것은 단체협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단체협약의 필요성은 이뿐만이 아니다. 단체협약이 소중한 시기는 사측과 이견이 생길 때이다. 예를 들어 편집, 교육, 선전활동 등의 시간을 뺄 때 기준이 된다. 현장 관리자들과 근로조건과 관련해 마찰이 있을 때 단체협약을 들이밀면 해결될 수 있던 것도 단체협약이라는 법적 근거에 의한 것이다. 즉 조합원들이 불이익을 받을 때 근거로 대는 것이 바로 단체협약이다. 단체협약이 흔히 수첩으로 만들어진 것도 휴대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단체협약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소중하고 절실하다는 것이다. 유 사무장은 “노조와 사전에 협의가 돼야 하지만 지금은 회사가 일방적으로 단협을 해지해 버린 상태여서 울분은 쌓이지만 단협이 없어 어디에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고, 법적 근거와 토대를 잃어버려 막막하다”고 한숨을 지었다.
이에 노조는 단협위반금지 가처분 소송까지 내봤지만 별무신통이었다. “회사는 단협을 위반하지 말라”는 정도의 법원 판결이 있었을 뿐, 실제 단협위반 시 법적 제재조치는 없었다는 것이다. “진정서와 검찰 송치 등을 통해 사용자는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벌금 300만원을 물고 나왔을 뿐”이라고 유 사무장은 전했다. 강상철 기자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노동과세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