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는 정식 교육도 받지 못 하였고 거대한 조직 속의 투사도 아니었다.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경험에서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그 어쩔 수 없음에 응답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어린 여공들의 처지, 3만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고 인간다운 삶을 위해 ‘바보 선언’을 하였다.

17살이 되기까지 전태일 열사의 삶도 사회의 밑바닥에서 가난으로 허덕이는 비참하고 가여운 인생이었다. 그의 성장 과정과 가족사만 봐도 눈물이 나는 비극의 한 장면이다. 하지만 전태일 열사는 거기에 굴하지 않았다. 자신의 차비를 여공들의 점심값으로, 자신의 휴식을 그들의 작업에 쏟아 부으며 그냥 마음 아파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생가하고 무던히 그 방법을 찾아갔다. 그가 접한 ‘근로기준법!’ 근로기준법대로만 지켜진다면 아니 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을 알기라도 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열사는 노동자들을 위해 할 일을 찾았다고 보고 우린 지금까지 ‘바보’였다는 선언을 하고 ‘바보회’를 만들었다.

노래에도 있듯이 ‘노동운동 하다 신세 망친다.’, ‘그런 거 해봤자 너만 손해본다.’ 등등 이 사회에서 부조리를 폭로하고 개선하는 일체의 운동에 대해 실패와 두려움으로 그 때나 지금이나 겁을 준다. 이러한 사회에서 바보가 되고 ‘바보 선언’을 하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 진정 사람의 삶에서, 우리가 하는 노동에서 부조리한 모습을 그냥 보아 넘긴다면 그것도 모자라 그러한 부조리에 편승해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지난 2007년 대선에서 국민의 많은 다수가 선거를 포기하기도 했지만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을 선출 한 것도 우리들이다. 다수의 국민이 경제 발전에 가려진 착취와 불공정을 외면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2008년 국민들이 들었던 촛불의 기억은 ‘바보선언’이 아니었을까? 전태일 열사의 ‘바보선언’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에서 주인으로 바로 서기 위한 각성이다. 언제까지라도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부조리가 남아있다면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양심 모두 전태일 열사의 깨달음처럼 바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전태일 열사는 처음에 자신의 힘으로 현장을 변화시키기 위해 재단사가 되기로 하였다. 하지만 결국 여공들의 편의를 봐준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그리고 바보회를 통해 노동부에 진정을 내고 근로감독관을 찾아가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모범 업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모두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열사는 누구에게 기대어 아니면 각성된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이 한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 하는 노동자에게 먹을 것을 좀 주고 입을 것을 좀 준다고 변하는 것은 없다. 그리고 아무리 훌륭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한들 자본과 권력 앞에 당당히 맞설 다수가 없다면 역시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마감한다.

그래서 전태일 열사는 사람의 존엄함을 믿고 사람들을 만나고 우리 모두 지난 날의 착취를 스스로 벗어나기 위한 ‘바보 선언’을 하자고 한다. 그리고 우리 힘으로 투쟁하고 세상을 바꾸자고 한다. 그러면서 결심한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라는 말을 남기고 한 평생 그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도록, 40년이 지나도 이 땅의 모든 핍박받는 노동자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다짐을 하고 산화하였다.

진정 사람의 길이 무엇인지 위대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남기고 전태일 사상을 우리에게 전하고 산화한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그 헛되이 하지 말라는 죽음은 자본과 권력이 사람의 목숨에 칼을 휘두르는 절망하고 외면하지 말고 싸워서 꼭 쟁취하라는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말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한유리 / 부천지역일반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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