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한 지 강산이 두 번 바뀌고 몇 년이 더 흘렀다. 도로가 넓어지고 건물은 높아지고 고층 아파트 세상이다. 누구나 승용차를 끌고 휴대폰과 인터넷이 결합된 스마트폰 시대가 되었다. 그만큼 노동자 생활은 나아졌는가? 먹고사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하지만 빈부격차는 늘어나고 노동자의 처지는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노동자간 격차도 더 벌어지고 비정규직은 늘어만 간다. 한눈 팔지 않고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왜 그럴까? 정권과 자본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아서, 그놈이 그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만 말하면 뭔가 허전하다. 바뀌는 정권마다 물러가라고 투쟁했고 지금도 하고 있지만 나는 어느 정도 책임을 다했는가? 치솟던 열정은 경험의 반복 속에 묻히고 임금인상과 단체협약 투쟁, 조직화투쟁은 거의 예측가능한 범주 안에 갇혀 있지 않는가? 몇 년 전, 부여잡고 있는 깃발이 너무 색이 바랬다고 느꼈을 때부터 전태일을 자주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20대 초반에 읽은 '어느 청년노동자의 죽음'은 전태일과 그 가족이 살아온 밑바닥 삶, 어린 여공들의 비참한 작업환경을 통해서 노동자 민중의 고통을 각인시켰다. 나아가 전태일이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동존중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해야겠다는 각오를 새기게 했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88년 이후 매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 때면 어김없이 전태일은 내게 찾아왔지만 나는 그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다. 자기 차비로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준 사람, 그 여공들의 열악한 근로조건을 개선시키려고 노력하다 산화한 순수한 열사로만 기억되었다.
애초 거창한 사상과 이론은 내 삶과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노동자 세상은 단순히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는 수준에서 만들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모든 이론은 회색이라 했던가. 스스로 기업자본 정권이라 한 이명박의 집권에 때 맞춰 노동자 중심성을 강조하는 진보정당은 분열하였다. 기존 노조운동은 촛불항쟁의 주변부에 머물렀다. 산별노조운동은 더 나아가지 못했고 의견그룹은 선거조직으로 전락했다. 현장 간부층은 점점 엷어가고 상층 간부층은 점점 늙어간다. 걷던 길이 점점 어두워지고 희미해질 때 전태일은 등불로 다가왔다.
다시 '전태일 평전'을 읽었다. 전태일은 진정한 운동가였다. 끊임없이 학습하고 조직했고 자기 삶의 전부를 노동운동에 바친 사람이었다. 스스로 사상과 이론이 된 투사였다. 그 후 전태일은 내게 새로운 깃발이 되었다. 조합원과 함께하는 시간이 생기면 어떤 식으로든 전태일의 삶을 끼워 넣어 얘기했다.
이제부터 '모른다'고 얘기하지 말자. '못 배워서', '잘 몰라서', '집안이 가난하고 형편이 안 좋아서', '부모님이 (배우자가) 반대해서', '회사 일하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따위 이런 얘기는 하지 말자. 전태일은 초등학교 2학년, 정식 중학교가 아닌 공민학교 1년의 학력이 전부이다. 그런 사람이 근로기준법을 스스로 공부했다. 한자로 되어 있어서 한자공부까지 하면서 읽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겠는가. 일 년도 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한 달에 두 번 쉬면서 하루 14시간 이상 일하면서도 꾸준히 공부했다.
거의 모든 조합원이 전태일보다 학교를 많이 다녔다. 전태일 집안보다 대부분이 잘 산다. 물론 시대적 차이가 감안하고라도. 자기가 노동자로 일하면서 한글로 된 '근로기준법'조차 제대로 읽지 않고 책 한권 없어야 되겠는가. 전태일은 당시 한달 월급 3분의 1에 해당하는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사서 공부하기도 했다.
전태일은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사람이었다. 바라던 미싱사가 되었지만 여공들의 근로조건 향상을 위해 좋은 업종인 재단사가 되기 위해 훨씬 적은 임금을 감수하고 재단보조로 취직했다. 평화시장의 열악한 근로조건을 직접 조사해서. 800여개 점포에 2만여명의 노동자라고 추정하였다. 설문지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배포, 수거하여 언론에 나오게 해서 사회여론을 움직였다. 바보회를 조직하고 운영이 여의치 않자 다시 삼동친목회로 재조직하였다.
'회사를 위해 일한 죄 밖에 없다'고 항변하지 말고 사건이 터지기 전에 자기 사업장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할 일 많고 집회도 많다고 푸념하는 사람들은 수백 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고군분투한 전태일보다 좋은 조건에서 활동하는 건 아닌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전태일은 사업장을 넘어 청계시장 전체를 대상으로 조직하였다. 말하자면 요즘 얘기하는 전략조직화의 모범이었다.
전태일 40주기를 맞아 일반노협은 '전태일 평전 읽고 독후감 쓰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전태일 평전 읽고 소장하기' 토론을 어느 조직보다 앞서서 진행했고 민주노총의 사업으로 전면화된 시점에서 독후감 쓰기를 시도하였다. 다만 몇 줄이라도 읽은 소감을 써 본다면 스스로 전태일의 마음으로 자신과 노조활동을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전태일은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을 정리하고 생각과 실천을 진전시키고 결단을 해갔던 것 같다. 일기를 쓰기도 하고 자신의 생을 돌아보며 자서전식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노동자 자주관리 시범기업에 대해서 쓰기도 했다. 유언 같기도 한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는 지금 읽어도 심금을 울리지 않는가. 그 문학적 소양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전태일은 신문팔이를 하면서도 단순히 신문만 판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읽어가면서 세상과 문학을 알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전태일은 천부적으로 글쓰기의 소질이 있어서 그런가. 아직 열사가 직접 쓴 글들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자신의 생활과 생각을 써보는 습관을 이어간 것이 가장 큰 것 같다. 전태일을 실천사상가 전태일로 만들어간 가장 큰 힘은 글쓰기였다고 생각한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서툴더라도 자신을 기록해보자. 자신과 대화하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자신을 단련시켜나가는 것은 '읽기와 쓰기'이지 않을까. 전태일 따라 배우기의 정수는 '풀빵 나누기'를 넘어서 '조직가 되기', 더 나아가 '글쓰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조직책임자로서 전태일을 생각해봤다. 삼동친목회를 조직하고 실태조사를 해서 언론에 난 이후 그의 책임감은 아주 높아졌던 것 같다. 특히 근로감독관과 정보과 형사들의 농간으로 3번이나 시위가 무산되면서 결단을 내렸던 것 같다. 무산되는 시위 과정에서 '나 하나 죽어지면 뭔가 달라지겠지'라고 되뇌였던 것은 마치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피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라는 예수의 심정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꼭 분신이라는 방법을 택해야 했을까.
이렇게 전태일은 노동자 민중과 함께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마르지 않는 샘이 되었다. 활동이 어렵고 전망이 보이지 않으면 전태일 샘으로 가자. 한바가지 떠 먹고 그래도 갈증이 풀리지 않으면 머리에 온몸에 끼얹어 정신들게 하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 전태일은 40주기를 넘어 영원하다.
최만정/ 일반노조협의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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