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5월이면 ‘향수’의 시인 정지용을 기리는 ‘지용제’가 그이의 고향 충북 옥천에서 열린다. 북으로 간 시인은 오랜 판금의 세월을 거쳐 지금은 지역의 향토상품이 됐다.

지용제의 꽃은 ‘정지용문학상’이다. 올해는 일흔을 앞둔 늙은 시인 문효치가 받는다.(중앙일보 28일 32면) 꼭 지용만큼의 서정 듬뿍 담긴 ‘백제시’를 연작했던 이다.

지용은 휘문고를 나와 일본 동지사 대학을 다녔으니 당시 말로는 ‘해외문학파’다. 그래도 지용은 휘문고에서 시샘을 긷고 평생의 동지들을 만난다. 지용의 휘문고 절친 동기는 이선근이다. 둘은 3.1운동으로 옥살이도 같이 한다. 지용 바로 위 학년엔 영랑 김윤식이, 그 위엔 월탄 박종화, 그 위엔 노작 홍사용이 있었다. 아래엔 월북한 상허 이태준이 있었다. 3.1운동 때 영랑도 잠시 옥살이로 했으니, 10대 후반의 이들은 모두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이들은 딱 거기까지였다.

이선근은 일제가 만든 만주 괴뢰국에서 조선인 가운데 최고의 직위까지 오른 열혈 친일파였지만 해방 후 서울대총장, 문교부 장관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일제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까지 참 오래도 비굴하게 살았다. 영랑의 친일이야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영랑과 월탄의 해방 후 행적도 이선근의 그것과 별 다르지 않다.

이정호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실장

해방 직후 1945년 8월18일 임화, 김남천, 이원조, 안회남과 <문장>지의 이태준, 정지용이 연합해 ‘조선문화건설중앙협회’를 결성했다. 의장에 임화, 서기국장에 김남천이 자진 당선했다. 반기를 든 온건좌파 이기영 송욱 윤기정은 1945년 9월말 임화를 종파주의라 배격하면서 새로이 ‘프로예술연맹’을 결성했다.

우익의 김진섭, 박종화, 이하윤, 양주동, 오상돈, 유치진, 김영랑, 오종식, 김광섭, 이헌구 등 20여 인은 45년 9월 18일 ‘중앙문화화협회’를 조직했다. 임화파와 온건좌파는 1945년 10월 ‘문학가동맹’으로 합친다. 해방 직후 문학의 좌우 갈등은 ‘해외문학파’라는 헛똑똑이들이 지어낸 허구다.

옥천의 자랑은 정지용이다. 옥천역부터 시인의 대표작 ‘향수’가 커다랗게 걸려 있다. 만약 그가 50년 한국전쟁 때 북으로 가지 않고 남았더라면, 그래서 친구 이선근과 한 세월을 여기서 보내며 세월의 떼를 묻히고 살았더라도 여전히 옥천의 자랑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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