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세계 501호] 기고 - 일하며 생각하며

다시 촛불이 타올랐다. 2008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촛불은 한 가득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수줍은 여고생의 애처로운 이야기, 대학등록금에 짓눌린 50대 가장의 고단함과 분노, 그리고 공부보단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 최저임금 노동자에 가까운 대학생의 일상. 그 모든 이야기는 나와 내 주변의 일상이 되어 촛불들을 웃기고 울린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제 나름의 풍자적 메시지를 담은 피켓을 들고 나온다. 거기서 권력은 권위가 아닌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특별한 이야기도 있다. 트위터를 통해 자신이 어딜 가는 줄 안 어떤 낯선 운전자가 그를 발견하고선 외제차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집회까지 태워줬다는 한 정신과의사의 특별한 경험 등… 촛불은 이야기고 공감이며 소속 없이도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한 바탕 전복(顚覆)의 놀이이다.

소통과 미디어의 시대, 이제 세상은 거창하고 어려운 이념과 문건이 아닌 이야기가 대중을 움직이는 시대가 됐다. 이는 아메리칸드림으로 포장되는 미국적 현상이기도 하고, 미국의 제국주의가 의도하지 못했던 대중들의 자발적 변화이기도 하다. 이 변화를 감지한 기업들은 예의 그 발 빠른 적응력으로 대중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캐나다의 저널리스트 나오미 클라인은 저서 <No Logo>에서 “다국적기업들의 부와 문화적 영향력의 엄청난 증대는, 상품보다 먼저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는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비롯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바이러스 마케팅 창시자 세스 고딘(미)은 “브랜드의 성공비밀은 브랜드가 전달하는 서사가 좌우한다”고 확언했다. 이는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상품사회는 브랜드도 아닌 스토리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말이다. 그렇듯, 이제는 음악도 이야기가 있는 영상으로 전파되고, '대중이 만든 이야기(YouTube)'로 변주된다. 광고도 상품의 품질보다는 이야기와 경험의 공유를 통해 소비자를 끌어오는 시대고, 유사 이래 모든 민족은 서사를 통해 형성되고 자신의 정체성을 대중적으로 표현해왔다.

그런데 문제는 민주노총이다. 민주노총엔 이야기가 없다. 뒷담화 따위 말고는 남에게 해 줄 사연이 없다. 아주 없기야 하겠느냐마는 대중적으로 회자되고 자발적으로 만들어가는 이야기들이 말라가고 있다. 지겨울 정도로 수많은 회의와 학습토론이 이뤄지지만 답답하도록 반복되는 문건의 주장들은 다른 발상과 소통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특히, 민주노총이 대중과 접촉하는 주요 방식인 집회는 더더욱 그렇다. 무대는 대중이 아닌 대표자들과 준프로 문화일꾼들이 차지했다. 판에 박힌 대표들의 선동연설은 울림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집회만 하면 연단에 세우니 할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조합원들에게는 “당신이 민주노총입니다!”라고 하지만, 그 당신들인 조합원들의 이야기와 목소리는 집회에 없다. 심지어 이제 투쟁가는 상황 여하를 막론하고 쩌렁대는 스피커가 대신 불러준다. 나는 민주노총 집회에서 옆 동지가 부르는 노래에 상기돼 본 기억이 없다.

이야기는 공감을 끌어내고 공감은 자발적 행동을 자극한다. 직설적인 선전과 선동으로 대중도 나 자신도 움직여지지 않음을 우리는 줄곧 봐왔다. 또한 수많이 재잘대는 이야기 속에는 창조성도 있다. 창조는 천재의 전유물이 아니다. 삼성회장 이건희는 한 명의 천재가 수천 명을 먹여 살린다고 했지만, 세계적인 경영컨설턴트 케빈 켈리는 <매일경제>와의 인터뷰를 통해 천재에 대한 기대부터 버리라고 했다. 그는 “창조성이란 조직문화만 바꾸어도 매일 일어날 수 있는 작은 변화들”이라고 확언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주역들은 바로 평범한 조직 구성원들이다. 그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재잘거리며, 부담 없이 실패와 시행착오를 꺾게 하는 것이 바로 지도자의 덕목이다. 현대인들은 하루에 6만가지 생각을 하는데, 그중 90%는 어제와 같은 생각이라고 한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선 지도자들부터 새로운 생각에 집중해야 한다. 실제로 아마르 히데 콜럼비아대 교수의 연구는 창업자의 88%가 천재적 생각이 아닌 일상적인 아이디어의 실행과 추진력으로 성공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대중들 스스로의 이야기와 생각, 그리고 공감으로부터 세상은 변화되고 있다. 민주노총이 혁신하려면 무슨 무슨 위원회들이 내놓을 완벽한 이론과 지도부의 지침에 의존하기보다는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내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사소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일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박성식/ 민주노총 부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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