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더글러스 러미스, 최성현·김종철 옮김,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녹색평론사, 2002.

오창은 중앙대 교수
상식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지만, 조금은 여유 있는 마음으로 상식을 깨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면 어떨까? 낯선 이야기 속에 오히려 더 강렬한 진실이 담겨 있는 경우가 있다. 책도 마찬가지다. 책은 자신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들을 통해 자기 신념을 검증하기 위해 읽기도 한다. 독서는 낯선 세계와 대면하면서 이뤄지는 사유의 확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는 한국의 노동운동에 관계하는 이들이 꼭 검토해 보아야 할 저작이다.

더글러스 러미스의 이야기는 여지없이 상식을 깬다. “민주주의에서 만약 대표를 뽑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제비뽑기라야 합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제비로 뽑았습니다.” 대의제 선거로는 가장 유명한 사람, 가장 돈이 많은 사람, 가장 사회에서 눈에 뜨이는 사람이 뽑힐 수밖에 없다. 반면, 시민이라면 누구나 대표가 될 수 있는 제비뽑기가 오히려 민주적이라는 것이다. 황당한 주장처럼 들리지만, 제비뽑기가 어떤 효과를 불러올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저 웃어넘길 일만은 아니다. 그 효과는 첫째, 누구나 우연히 대표가 될 수 있으므로 누구나 준비를 해야 하고, 그렇다보면 일상생활에서도 책임감이 높아진다. 둘째, 제비뽑기로 뽑힌 사람은 자신이 잘나서 뽑힌 것이 아니기에 오히려 겸손함으로 충실히 업무를 수행한다.
 
즉, 정치가의 권위와 타락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셋째로, 장기집권이 불가능해진다. 참여민주주의의 중요한 형식이 제비뽑기를 통해 구현될 수 있다. 더글러스 러미스가 ‘제비뽑기 민주주의’를 제안하는 이유는 민주주의의 근본정신을 다시 환기시키기 위해서다. 그는 “무력감을 느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사회의 변화와 자신의 운명에 개인이나 집단이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무력감’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이다. ‘제비뽑기 민주주의’는 한국현실에서는 선례가 없기에 실현가능성이 낮은 것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노동조합 선거, 동호회 선거 등 크고 작은 내 주변의 선거에서 실제로 적용해볼 법한 민주주의이다.
 
이 책은 이렇듯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현대인의 왜곡된 상식을 날카롭게 해부한다. 제1장에서는 파멸을 향해 치닫는 자본주의 현실을 제시하고, 제2장에서는 국가와 폭력의 문제를 일본 평화헌법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제3장은 경제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피폐화되고 있는 인간의 삶을 분석해냈다. 제4장은 일과 소비에 중독되어 행복한 삶이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성장주의를 비판하고, 5장에서는 민주주의의 문제를 근본주의적 태도로 다루면서, ‘경제를 민주화해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을 펼친다. 한국 독자가 읽기에는 2장의 내용이 특히 낯설고, 읽기가 녹녹치 않을 것이다. 일본의 현실에 밀착해, 평화헌법 9장과 교전권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3·4·5장은 일본의 현실과 한국의 현실, 그리고 세계자본주의의 현실이 동일한 맥락 속에서 펼쳐지고 있기에 숙고해 읽어볼 필요가 있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경제발전’은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한다. ‘경제개발 이데올로기’는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1949년 1월 20일 취임 연설에서 행한 ‘미개발 국가(under-development country)’에서 유래한다. 이때부터 경제발전이 국가의 정책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념해야 할 부분은 미국이 경제발전의 정책 대상으로 삼은 것은 미국 자신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가난한 나라였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미개발국가를 자본주의체제로 변화시키고, 이를 통해 투자이익이 되돌아오게 하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이 매년 내놓은 경제성장 수치는 지구적 자본주의 착취시스템에 어느 정도 편입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수치이며, 더 큰 틀에서는 자연을 파괴하고 지구생태위기를 자초하는 수치인 것이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경제발전을 통해서는 빈부의 격차가 해소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빈부의 차이는 성장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正義)의 문제’이고 ‘민주주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 노동운동도 경제성장의 강박에서 벗어나, ‘경제민주화’를 통해 한국사회의 민주화에 근본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 경제성장은 20세기 내내 생태 위기를 심화시켰고, 세계경제 시스템의 단일화로 인해 인간이 꿈꿀 수 있는 행복한 삶이 ‘돈 많은 삶, 소비하는 삶’으로 왜곡시켰다.
 
한국사회의 정치적 쟁점이 되고 있는 복지문제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답은 간결하다. ‘경제발전 이데올로기’의 강박에서 자유로워지면, 복지문제의 정치적 핵심이 드러난다. 한국의 복지를 둘러싼 논란의 해결점은 ‘성장의 문제가 아닌 정의의 문제’로서 우리 사회의 진로를 전향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 민주화’가 핵심적인 과제일 수밖에 없다.
 
오창은(지행네트워크 연구위원, 중앙대 교양학부대학 강의전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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