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엽 시인/희망 뚜벅이 동행기

희망의 길을 찾아 괴나리봇짐을 챙겨 길을 나선 이들이 있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희망 발걸음’이 지난 1월 30일 시작되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뚜벅이’들이 모여들었다. 혜화동 재능교육에서 평택 쌍용자동차까지, 지름길과 빠른 교통수단을 모른 체하고 뚜벅뚜벅 걷는 이 길은 어찌 보면 절망의 순례다. 천오백일을 길바닥에서 싸우고 있는 학습지 교사들의 농성장에서 스무 명의 동료를 죽음으로 내몬 쌍용자동차까지 걷는 길 곳곳은 절망의 생생한 현장이 아닌가. 그것도 12박 13일을 이 추운 겨울에 나섰으니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하지만 걸어야 했다. 걷는다고 희망이 불쑥 아침 태양처럼 떠오르리라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대로 멈추면 헤어나길 없는 절망 밑바닥에서 서서히 죽어갈 수밖에 없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길을 나선다.

뚜벅이의 행진이 시작되자마자 경찰은 방패로 길을 막았다. 희망의 깃발을 접어야 길을 내주겠단다. 꽃분홍빛 천에 ‘희망 뚜벅이’가 적힌 몸자보를 벗어야 걸을 수 있단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뚜벅이들은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한 채 방패에 감금되어 네댓 시간을 추위에 떨어야 했다. 희망을 접은 체 걸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막히고 뚫고, 에둘러 가기를 거듭하며 뚜벅이들은 한 발짝씩 내딛었다. 역사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간다고 했건만 노동자의 저항은 끊임없이 물러서고 있었는지 모른다. 저항이 반 발짝 뒤로 물러서는 순간, 노동자의 삶은 열 발짝씩 뒤처지고 있었다. 87년 노동자들의 거대한 함성은 정리해고에 묻혔고, 비정규직의 양산으로 신음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다. 뚜벅이들은 이 절망의 바위에 달걀을 던지며 모질고 미련스럽게 하지만 우직하게 뚜벅뚜벅 앞만 바라보며 걸었다.
 
그 미련한 걸음 때문이었을까? 뚜벅이가 첫날밤을 함께 보낸 세종호텔에서 승전보가 들려왔다. 희망발걸음을 잉태했던 희망버스의 기획자 송경동과 정진우가 석방되었다. 노동조합을 만든 뒤로 징계와 해고, 차별을 받으며 만신창이가 되었던 한국3M 노동자들은 다시 파업의 깃발을 올리고 거리로 나섰다. 외로웠던 절망들이 뭉치자 절망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었다. 뚫고 나갈, 뚫어야 할, 그리고 기필코 뚫릴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길이었다.
 
55년만의 혹한이 밀려왔고, 폭설이 뚜벅이의 발등을 덮었다. 모질게 추웠다. 하지만 함께 걷기에 이겨낼 수 있었다. 얼음장 같은 바닥에 발발 떨면서 밤을 지새우면서도 혼자가 아니기에 행복했다. 푹푹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걸었다. 발가락에는 물집이 잡히고 허리는 끊어질 듯했다.
 
걷는 일보다 힘든 일은 서로의 보폭을 맞추는 일이었다. 자신의 보폭을 버리고 서로의 보폭으로 걸어야 했다. ‘행진속도가 느리니 걷기가 더 힘들다’는 볼멘소리가 있었다. 한쪽에선 ‘속도가 빨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을 거치자 볼멘소리도 한숨도 사라졌다. 자신의 보폭을 버리기 시작했다. 뚜벅이의 ‘서로의 보폭보폭을만들어졌다. ‘서로의 보폭’은 가장 느린 이의 발걸음이다. 함께하는 세상이란 이처럼 가장 느리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들에게 맞춰 걷는 일이다.
 
뚜벅이들과 한 발짝 옆에서 걸으며 울보가 되었다. 입술이 터져가면서도 힘든 일을 서로 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에서 울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된 잔일을 발바닥이 부르터라 뛰어다니는 이들을 보며 울었다. 스스로 ‘바보’처럼 우스갯거리가 되고 놀림감이 되면서도 성은커녕 동료들의 즐거움에 환하게 웃는 뚜벅이들을 보며 울었다. 쉬는 짬에 동료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점심을 먹고 나면 꼬박꼬박 껌을 사서 돌리는 순박함에 울었다.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뜨듯한 차를 끓여 뚜벅이를 기다리는 연대의 손길에 울었다.
 
절망이 넘쳐나는 2012년, 어느덧 희망은 길목 여기저기서 뚜벅이들의 발자국소리와 함께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 가능하다!’ 시민들의 응원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가 아닌 발바닥으로 살아야 세상은 바뀐다는 걸 확인했다. 얼지 않으면 된다. 쫄지 않으면 된다. 머리 굴리지 않으면 된다. 저항하는 자, 세상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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