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의 오랜 욕망

▲ 민주노총 박성식 부대변인.이명익기자
방송이나 언론들은 웬만한 이슈가 아닌 이상 노동문제를 잘 다루지 않는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거기에는 분명 이런 이유도 있다. 제 발이 먼저 저리는 도둑의 심정이랄까. 최근 만난 한 기자는 이렇게 투덜댔다. 언론이랍시고 미주알고주알 입바른 소리를 하는데, 정작 그 언론 내부를 보면 문제가 지천이란다. 그러면서 기자는 언론사의 비정규직 남용과 당연시 된 무급 연장노동에 대해 토로했다. 퇴근이 보장되지 않는 기자생활이란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때문에 기자는 평균수명이 가장 짧은 직업군에 속한다. 정해진 근무시간에는 당연히 일해야 하고, 근무시간 외에도 당연히 일해야 한다. 일반 회사에서도 야근은 당연한 풍경이 된지 오래다. 2007년엔 심지어 매일 칼퇴근 하는 직원을 폭행한 사건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여전히 칼퇴근은 용감하거나 혹은 무모한 행위로 취급된다. 자투리 노동은 자본의 오랜 욕망이다. 그렇다고 꼼꼼하게 야근수당을 챙겨주는 일은 결코 없다. 1856년 한 공장감독관이 기록한 보고서에는 자본가의 이런 고백이 나온다. “나에게 매일 10분씩만 초과노동을 시키도록 눈감아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1년에 1천파운드스털링을 내 호주머니에 넣어주는 셈이라오.” 자투리노동은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노동’이다. 온전히 계산되지도 지불되지도 않는다. 사실상 노동시간 갈취나 다름없지만 그냥 이뤄지는 일이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노동’은 노동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불이익이자 가장 일상적인 스트레스 요인이다. 퇴근 직전 일을 지시하는 상사는 그야말로 밉상이다.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으면 속이 타들어간다.
 
- 사소한 일, 사소하지 않은 결과
 
한편, 이와는 다른 성격의 ‘보이지 않는 노동’도 있다. 예를 들면 노동조합 사무실과 같은 공유공간에도 존재한다. 누군가는 전혀 한바 없지만,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복사지는 치워져있고, 어지럽혔던 탁자가 정리되고 화초는 물을 먹고 자란다. 모르는 사이 때가 지난 벽보는 떼어지고 내 책상으로 우편물이 배달된다. 냉장고가 정리되고 프린터에 종이가 채워진다. 사무실과 사업진행의 여기저기를 살피는 세심한 시선과 손들이 일상을 유지한다. 집에서도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가정을 지탱하기 마련이다. 이들 노동은 역시 계산되지도 지불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보이지 않는 노동’은 자기 일에만 열중하는 A에게는 관심의 대상도 아니고 정말 보이지도 않지만, B에게는 유독 눈에 뜨이고 자발적인 노동을 요구한다. B에게도 고유한 자기 일이 있다. 매번 ‘보이지 않는 노동’을 추가로 해야 하는 B는 점점 A와 조직에게 불만이 쌓인다. 그렇게 관계와 신뢰는 서서히 무너진다. B가 ‘보이지 않는 노동’을 거부하는 ‘보이지 않는 파업’을 시작하면 A와 조직은 비로소 그 노동을 발견하고 불편을 호소한다. 대개 이런 종류의 ‘보이지 않는 노동’은 소소하고 하찮은 일이라 여겨지지만, 어떤 공간의 보존과 원활한 일의 진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동료든 가족이든 상호관계의 신뢰와 호응을 위해서도 자발적으로 투여돼야 할 노동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노동’에 얼마나 신경을 쓰며 살고 있을까? 착취를 위해 애써 보려하지 않는 노동을 사회에 드러내 보여주고 개선하는 일. 상호관계와 사업을 위해 사소한 일상과 자잘한 업무를 챙기고 살피는 일. 전자는 투쟁의 영역이라면 후자는 자발성의 영역이다. 전자는 상대가 있다면 후자는 나로부터 변화될 수 있는 일이다. 이 중에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자발적인 ‘보이지 않는 노동’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리하여 노동을 나누고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업무 과정에서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노동’을 세심하게 찾아내 수행해야 한다. 노동운동에서 나타나는 빈번한 집행의 실패와 유실, 이유를 찾지 못하는 그 낭패감, 그것도 어쩌면 다양한 종류의 ‘보이지 않는 노동’을 방치하거나 그저 누군가의 자발성에만 맡겨 놨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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