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과 ‘오래된 것으로 여기는 것’

우리 삶의 감각에서 친숙한 것들은 고유한 역사를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우리의 기억에서 익숙한 사물들은 시간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그곳에 있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이나 그것들은 시간의 저편에 있다기 보다는 기억의 아주 오래된 저편부터 있어 왔다는 의미에서 시간과 무관한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주 오래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실제로는 ‘아주 오래된 것’이 아닐 수 있다. 이렇듯 ‘아주 오래된 것처럼 여겨지는’ 친숙한 일상의 사물들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자신을 오래 된 것으로 위장하는 신비한 베일을 휘감은 존재이며, 그 베일이 두꺼울수록 그것들의 역사를 발견한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일상 음식들의 역사를 발견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은 무엇보다 신비스럽게 위장된 그 두꺼운 비(非)시간성의 베일을 벗기는 작업이기도 하다.
 
주영하의 ‘음식 인문학’은 바로 그런 작업이다. 그에게 음식은 단순한 한끼의 식사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상호과정’에서 선택된 특정한 재료를 ‘조리법(recipe)’이라는 “문화적으로 선택하여 기호에 맞는 음식물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자 ‘의례’이며 ‘규범적 행위이다. 요컨대 음식의 조리와 식사라는 행위는 ‘한솥밥(共食)’이라는 말이 표현하는 것처럼, 사회적이고 문화적 행위인 셈이다. 주영하는 그렇기 때문에 음식에 대한 문화적 접근은 “가능한 한 총체적 입장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음식학 연구가 지금까지처럼 영양학이나 농학, 미식학과 같은 분과를 넘어 철학과 역사학, 문화연구, 사회학, 인류학, 민속학 등의 제반 학문으로 번져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전통’이나 ‘민족음식’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된 ‘아주 오래된 기억’의 가장(假裝)을 해체하고, 온전한 시간과 역사의 지평 속으로 되돌려 놓는 일이다. 그리하여 주영하는 일상의 음식, 한국의 음식이 지난 백 년 간 한국 사회의 급격한 근대화에서 빗겨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역시 근대적 변용이라는 숙명을 짊어지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예컨대 우리가 흔히 먹는 ‘전통적인’ 배추 김치는 19세기 말까지 존재하지 않았으며, 비빔밥에 빨간 고추장이 들어간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부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다소간 충격에 빠져들 법도 하다. 고추와 젓갈이 18세기나 되어서야 김치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배추 김치의 주재료인 속이 꽉 찬 결구배추는 19세기 말에나 중국 산동성에서 전해졌으며, 고추장은 고명으로 들어간 육회의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1920년대 진주에서 처음으로 넣었던 것이다. 배추김치와 비빔밥의 역사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된 농작물의 세계화와 농업 생산력 증대가 큰 역할을 하였다.  ‘오래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아주 오래된 것’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아주 오래되지’ 아닌 것들을 ‘아주 오래된 전통’으로 여기는 이유가 단지 그것들이 친숙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영하는 20세기 초반 식민지 지식인들이 추구한 ‘조선적인 것’이 그 기원일 수 있다고 말한다. 서구 낭만주의자들이 근대에 저항하여 상상 속의 중세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벽초 홍명희는 소설 임꺽정을 통해 일본의 식민 지배와 억압적 근대에 대항하여 상상적인 ‘조선적인 것(Koreanness)’으로서 ‘조선정조(朝鮮情調)’를 만드는 데 몰두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조선적인 것’은 이후 ‘한국적인 것’의 원형인 셈이다.
 
친숙한 사물들의 진정한 기원과 본질을 밝히는 작업은 그것을 둘러싸고 ‘아주 오래된 것으로 여기게’ 신비화하는 베일을 벗겨내는 것이다. 그랬을 때만 우리가 아는 사물들의 친숙함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진실된 과거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음식 인문학(주영하, 휴머니스트. 2011) /필자 유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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