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판결과 투쟁동력은 류기혁열사와 1000여 명 해고자들 핏값으로 얻은 성과”

2010년 7월 22일 대법원은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인 최병승 씨에 대해 불법파견임을 확인하고 최 조합원 입사일인 2002년 3월 13일로부터 2년이 경과한 2004년 3월 13일부터 현대차가 직접고용한 것으로 간주된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서울고등법원 파기환송심을 거쳐 지난 2월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이어 2012년 5월 2일 중노위는 ‘현대차 부당해고구제재심판정에 대한 재처분’ 판정회의를 열고 원청인 현대차 부당해고를 결정했다. 이에 현대차는 원직복직 중노위 결정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진행키로 했다고 한다. <노동과세계>가 지난 23일 울산 현대자동차지부 해복투 사무실에서 최병승 조합원(37세)을 만났다. 그는 지난 2010년 12월부터 수배 상태다. <기자의말>

▲ 현대자동차비정규지회 최병승 조합원. 이명익기자
△언제부터 수배를 받았고 현재 신변이 어떤 상황인가?=2010년 12월 8일부터 수배다. 2010년 11월 15일부터 25일 간 현대차 울산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인 것 관련해서다. 올해 2월 23일 판결이 나기 전에 여기 들어왔다. 3개월이 조금 넘었다. 한 달 전부터는 공장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간다. 지부 방침으로 중식 시간 1시간 동안만 돌아다니는 것이 허용된다. 수행이 반드시 함께 다녀야 한다. 그 전에는 식당에도 못갔다. 제가 동지들에게 농담 삼아 고공농성 중이라고 했다.

제 모습 봐서 알겠지만(웃음) 여러 가지 좋아하는 게 많다. 특히 제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콜라다. 담배도 피우고 술도 좋아하는데 위문오는 분들이 가끔 가져다 준다. 조합원들 표현대로 하면 위병소에 오는 느낌이라고 한다. (박현제) 지회장은 저보고 콜라중독이라고 할 정도다.

△2010년 7월22일 판결로 시작해서 수 차례 법원과 중노위로부터 현대차 정규직임을 인정받았는데=사실 2010년 7월 22일 판결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당시 제가 금속노조 비정규미조직국장이었는데 변호사가 제게 전화해서 대법 판결이 있는 날이니 가보라고 했다. 본인이 지방에 있으면 아예 말도 안하겠지만 그래도 서울에 있고 마지막 판결이니 가보라고 했다.

그래서 대법원 구경가는 셈치고 갔다. 가서 30분인가 꽤 오래 기다렸다. 형사, 민사, 특허 그 다음이 행정재판이었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대법원 권위가 워낙 높으니 손들고 물어보지도 못했다. 나와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울산공장 법무팀 사람들이 와서 축하한다고 했다. 그때 비로소 ‘아, 맞구나!’ 싶었다.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판결 결과를 알렸더니 “왜 그렇게 판결이 났을까?”했다. 변호사는 판결문을 두 차례나 읽더니 저를 보고 또다시 “야, 왜 이렇게 판결이 났냐?” 했다. 솔직한 느낌은 반갑고 기쁘다기보다 당황스러웠다. 노조와 다른 동지들에게 알리고, 그리고 아산에서 소송 중인 동지들에게도 연락을 했다.

그 후 나머지 판결은 크게 뒤집힐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7.22 대법 판결 후 사람들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남은 중노위 재처분도 잘 정리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제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노동위원회가 상당히 정치적인 집단이고, 중노위도 굉장히 보수화 돼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좀 신경을 써야겠다고 판단했고, 지회 동지들과 의논해 이호동 위원장과 금속노조 소송 관련 법률팀 지원을 받았다. 지회는 중노위에서 노숙농성을 벌였다. 이 관계들을 조화롭게 해서 잘 대응한 결과라고 본다.

저는 현대차가 여기서 사안을 중단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법까지 가겠다 했다. 현대자동차가 고민하는 게 뭘까 생각해봤다. 교섭도 열리고 있고 교섭에서 (회사가) 어떤 내용을 제출할지는 모르나 정규직이 아닌 다른 형태의 직접고용을 내밀며 이걸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최병승 처럼 10년 넘게 법원 판결을 기다릴 것인지를 선택할 지를 강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방식으로 압력을 행사할 수도 있는 일이다.

회사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현장 비정규직을 위축시키려 할 것이다. 최근 신규채용 공고도 났는데 이런 기회를 활용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갈등을 유발할 것으로 본다. 현대차 입장에서는 제가 (정규직으로) 복직돼선 안되는 것이다. (비정규이 정규직으로 복직하는) 샘플이 돼선 안되는 것이다.

박유기 전 금속노조 위원장이 농담처럼 “몇십억을 줘도 너는 복직 안시킨다”고 했다. 회사 사람들과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들은 것인지, 아니면 본인 판단을 이야기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회사 입장에서 제 복직은 절대로 허용할 수 없는) 상징적문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현대자동차비정규지회 최병승 조합원. 이명익기자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 지난 투쟁, 또 본인의 투쟁이력을 설명한다면?=우리 현대차 울산비정규직지회는 그동안 총 네 차례 파업을 했다. 2005년 1월 18일부터 5공장이 파업을 시작해서 그해 9월 중순까지 100여 명이 해고될 때까지 파업투쟁을 전개했고, 1,2,3공장은 1월 초기 파업 때 3일 간 잔업 거부투쟁을 벌였다.

2005년 8월 수차례 부분파업을 전개했고, 2006년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 간 부분파업을 진행했는데 저는 지회 사무장으로서 2005년 파업 건으로 2005년 9월부터 수배 중이었다가 8월 14일 구속됐다. 2005년, 2006년 파업으로 3개월 정도 감옥에서 살았다.

그리고 네번째가 바로 2010년 11월 15일부터 12월 9일까지 25일 간의 파업이다. 파업이 정리되기 하루 전인 12월 8일부터 수배됐다. 검찰이 들이미는 혐의사실은 집시법과 공동정범 등이다. 총 18명이 수배돼 5명이 구속됐었고, 12명은 불구속 재판 중이다. 이제 저만 남았다. 제게는 세번째 수배다.

2005년 파업 건으로 3개월 살고 2006년 나와서 2009년에는 미포조선 파기환송심 판결 관련해 지역지원대책위 집행위원장으로 5개월 간 수배 중 잡혀 들어가 구속됐다가 2010년 3월 26일 출소했다. 그해 10월 14일 재판이 끝나고 21일 확정판결이었는데 사실 당시 1년에 6개월, 6개월에 1년 등 집행유예가 2개 있었다.

판정 후 1개월 만에 집회를 주도하면 분명히 또 문제가 생길텐데 외상값 13개월에 이번에 구속되면 가중이니까 3년을 살아야 하는구나 싶었다. 3년을 살아야 하나, 도망을 가야 하나 정말 고민했다. 어쩔 수 없나 보다 했다.

확정판결을 받고 나서 제가 조합원들에게 같이 투쟁하자고 했는데, 조합원들은 바로 그 행위를 하고 있는데 제가 그런 것을 고민하는 것은 진실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조합원 동지들에게 창피하지만 그 고민을 했다고 고백했다.

△비정규직 문제 관련해 동일노동 동일임금, 차별해소 등을 대안으로 말하는 목소리가 있는데=유럽 사례를 비교하며 그런 이야기를 많이들 한다. 우리나라 산업구조에서는 사회보장을 기업이 전적으로 책임지게 돼 있다.

고용이 불안할 때 실업급여를 받는 것부터 시작해서 의료혜택, 교육비 등 모든 것이 사회제도적으로 안착돼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회사가 노동자들 요구에 의한 단체협약으로 보장하는 형식이다. 단순히 유럽의 고용구조가 이렇다는 방식으로 한국 사회 고용구조에 대해 이야기하고 지적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이것을 전제로 할 때, 이번 대법원 판결 의미는 제조업 사내하도급은 불법이라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핵심이다. 그렇다면 그 불법적 요소를 해결하는 방식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할 때 법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이미 파견법 취업규칙을 통해 동일한 노동에 대해 동일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고, 인터콘티넨탈호텔 사례에도 동일업종을 정규직화해야 한다는 판결이 있다. 2년 이하자의 경우는 불법파견 사업장이 고용의 의무를 갖도록 한다. 제조업 사내하도급이 불법이라면 그와 동일하게 일하는 전체 노동자에게 적용돼야 한다.

착취문제를 말한다면, 이번 판결을 통해 제가 입사한 2002년으로부터 2년이 경과한 2004년 이후로는 현대자동차에 불법적으로 파견됐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10년 간 비정규직 노동자를 사용해 이익을 남겼으면 이제 마땅히 노동자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노동자에게 돌려줘야 한다.

노동자가 정규직을 요구하는 것, 불법적으로 고용돼 착취당하며 온갖 차별을 받은 것에 대해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요구다. 어떤 위치와 상식에 근거해도 무리하지 않다. 최소한의 자기 요구다.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결성에 대해=2003년 5월 현대자동차비정규직투쟁위원회(이하 비투위)를 만들고 비정규직 노동자 단결을 외치며 투쟁을 시작했다. 그해 7월 노조도 만들었다. 저는 그때 노조에 가입하지 않았다. 방향성 논쟁이 있었다.

당시 노조 결성을 놓고 세 가지 안이 있었다. 현대차지부가 2003년 정규직 직가입 관련 규약개정을 논의하고 있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 조합원으로 받는 것 여부를 놓고 토론을 했다.

노조를 직접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 정규직지부의 직가입 논의를 지켜보고 하자는 입장, 기한을 설정해 그때까지 확정이 안되면 노조로 전환하자는 세 가지 주장이 비투위 안에서 나왔다. 제가 두 번째 직가입 논의를 보고 하자는 안을 냈다.

결국 직접 건설하자는 첫 번째 안이 채택됐고 저는 2004년 초 조합에 가입했다. 그때로부터 9년 째 싸우고 있다.

△본인 생각하는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의 가장 큰 성과라면=거짓말쟁이가 아니었음을 증명한 것이다. 제가 그동안 걸어온 일련의 과정은 노조가 기획한 사업이다. 지금까지 진행한 투쟁은 2004년 5월 불법파견 진정을 집단적으로 넣어보자고 한 것으로 시작된다. 이 성과는 오롯이 노조가 갖고가야 한다. 잘 버텨서 노조가 9년 간 투쟁해 온 것이다.

7월22일 판결 후 공장에서 보고대회를 하면서 저는 동지들에게 불법파견 노동자가 정규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8년을 기다려 노조가 거짓말한게 아니었음을 증명하게 돼 기쁘다. 개인적으로 그게 가장 좋다. 언제나 노조가 하는 이야기는 맞다. 우리 투쟁은 정당했다.

10년 간 어렵고 힘든 가운데 줄기차게 투쟁해 오는 동안 어떤 이는 무리하다고, 불가능하다고 했다. 노조가 10년 간 투쟁해서 그것이 올바른 것이고 가능한 것임을 확인시켰다는 사실이 저는 정말 좋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류기혁 열사가 돌아가시고 몇 백명이 잘려나가고 거의 1000여 명 가까이 징계를 당하며 그야말로 핏값으로 얻은 성과이기 때문이다. 투쟁하다가 해고되고 여러 가지 문제로 떠나간 동지들이 많다. 그들이 봤을 때 자신이 올바른 일을 했다고 할,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할 근거가 생긴 것이 가장 좋았다.

▲ 2010년 현대자동차 비정규지회의 점거파업 24일차... 파업이 막바지에 이르자 회사가 비정규지회 조합원들에게 한 것은 전기차단과 음식물제한 조치였다.2년이상 일한 비정규직이 법대로 정규직이 된다는 것은 회사에게는 너무나 위험한 일이였기 때문이다. 이명익기자
△무엇을 위해 투쟁했으며,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조합을 맨 처음 만들자고 할 때 저는 억울하면 이야기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했다. 혼자 말하면 힘드니까 둘이 하면 편하고 셋이 하면 의지가 되고 많이 하면 우리 힘도 있을 거 아니냐고 했다.

노동자가 자기표현을 하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직장인으로서 자동차 공장에서 10시간 일한다. 점심시간 1시간, 출퇴근시간 2시간을 포함해 총 13시간을 이 공장을 위해 산다. 여기 와서 우리 표현도 제대로 못하고 살면서 열심히 볼트를 조이고 조립을 하다가 간다. 표현하고 살 길이 없다. 집에 가면 자야 한다. 작업장에서라도 표현하고 살아야 하고 자기 꿈을 이야기하며 서로 소통하면 좋겠다.

저는 노조를 만들 때 그런 작업장을 만드는 것이 선차적으로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과정이 있어 왔다. 노동시간 단축문제를 비롯해 작업장에서 말한 것을 사회에 나가서도 전 사회적으로 확장하자고 했다.

그 표현의 요구는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정규직화 요구, 차별철폐, 당장 내게 부당하게 닥친 문제일 수도 있다. 지금은 그 요구 중 당면한 것이 차별을 없애고 똑같이 하자, 법원이 이미 판결했으니 그 판결을 이행하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앞으로도 똑같을 것 같다. 내가 노동자고 복직을 해도 일해야 하고 13시간을 공장을 위해 잡혀있어야 하는데 생각이 변하겠는가? 회사가 저를 해고했고 그 기간에 세상 구경을 많이 해서 제 시야나 바라보는 눈이 넓어졌으니 조금은 덜 당하지 않을까? 그게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우리 조합원들도 처음에는 제게 우리가 여기 있으면 얼마나 오래 있겠느냐고, 조금 있다가 가겠지 했다. 2000년도 초반에만 해도 우리끼리 우리 조합원들 사이에서 그런 말을 많이 했다. 그 때 그 사람들이 아직 많이 여기에 있다.

제가 요즘에 조합원들을 만나 그 생각이 나면 “집에 간대메, 임마! 하청이 10년 다니면 그게 하청이냐? 직장이지”하고 말을 건다. 그러면 그 조합원은 “갈데 없어, 임마” 하고 응수한다. 재미있게 옛날이야기 하면서 살면 좋겠다.

△개인적 소망이 있다면?=현대자동차에서 비정규직 몇 명이 정규직이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대법 판결이 제조업 사내하도급이 문제라고 했고, 저는 어떻게 이것을 확대할 것인가가 제 관심사다.

우리가 이 투쟁을 했으니 옆의 사업장이 투쟁하면 어떻게든, 돈을 내서 도와주던, 몸이라도 대던, 그것도 못하면 편지라도 쓰던,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그 투쟁을 확대시키는 것이 바로 현대차 투쟁을 더 의미있게 만드는 것이다.

현대차 투쟁으로 몇 명, 아니 많은 수가 정규직이 되는 것으로 끝난다면 운동적 의미가 아무 것도 없다. 제 바람은 현대자동차 바로 옆에 있는 효문공단으로, 부품사들로 이 투쟁이 확대되는 것이다. 과거 87년 노동자대투쟁이 거제에서 시작되지 않았는가?

우리 투쟁이 울산에서 시작해서 경주 외동공단으로 올라가고, 구미로 올라가고 서울까지 가서, 비정규직 사내하도급제도가 정말 불법이고 사내하청이라는 고용형태가 없어져야 하고 그렇게 고용된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이 되는 것이 상식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그런 투쟁을 언제 어떤 사업장 노동자들이던 모두 함께 한 번 해봐야 한 판 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조합원들이 월 4000만원은 받는다. 하루 주야 10시간 뺑뺑이 치고, 한 달에 14시간짜리 특근을 2회 하고 그러면 4200에서 4300 정도 받는다. 다른 중소사업장에 비하면 그렇게 적지 않다.

2007년 이랜드투쟁 때 한 번은 한 달에 월급과 상여금, 성과금까지 해서 800만원 넘게 받은 적이 있다. 간부들에게 제가 “돈이 좀 없느냐?”고 했더니 왜 그러냐고 해서, “너희들 한 달 임금이 이랜드 노동자 1년 연봉이다, 10만원씩이라도 내서 갖다주라”고 했다. 머슴도 대갓집 머슴이 훨씬 낫다고 비정규직 내에서도 그런 게 있다.

2005년인가 비정규직노동자대회에 가서 한 부품사 정규직 노동자를 만났는데 그는 “(비정규직이라도) 우리보다 임금도 많이 받고 처우도 좋은데 자기들 사업장 문제는 전국노동자대회를 안해주고 비정규직이라고 해준다”며 기분 나쁘다고 했다. 그때 제가 그 분에게 오뎅을 사드렸다.

비정규직 노조가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것이 맞다는 정당하다는 공감대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우리 조합원들이 함께 하는 투쟁을 어떻게 만들지, 책임지는 모습을 어떻게 보일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유사한 투쟁에 대해 금속노조이나 민주노총에서 이런 사례, 이런 투쟁이 있었다고, 우리 투쟁은 어떻게 해보자고 제안하는 매뉴얼을 만들면 좋겠다.

▲ 현대자동차비정규지회 최병승 조합원. 이명익기자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상황에 대해=2003년 노조를 만들 때 126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2005년 파업 전까지 조합원은 250명 정도였는데 그 해 파업 때 1300명이 파업에 참가했다.

그러면서 2005년 현대차노조와 함께 집단조직화사업을 벌였고 비정규직지회에 집단가입이 쇄도했다. 조합비를 내는 노동자가 1800명까지 됐지만 2005년 8월 파업 후 조합원들이 우루루 탈퇴했다.

파업 후 류기혁열사가 돌아가시고 탈퇴서가 하도 많아 10월 1일부터 제가 조합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공제 체크를 했다. 그 결과를 갖고 당시 “우리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자랑스러운 조합원이다”라는 슬로건 아해 1200명 이름을 명기해 게시했다.

그 다음 집행부 위원장이 바로 현 박현채 지회장이다. 제가 그때 사무장이었다. 합의과정에서 직권조인을 했다며 내부 논란이 있었다. 그 결과 집행부가 사퇴했고 비대위가 꾸려졌다. 파업대책위를 구성해 비대위원장이 대책위원장이 돼야 했고 부담이 되니까 회사를 그만둬 버렸다. 그 바람에 비대위가 무너졌고 공백기를 거쳤다.

조합에 지도부가 없는 상황에서도 800명이 노조를 지켰고 2010년 판결 전에 600명이던 것이 판결 후 조합비 납부 기준 1905명까지 됐다. 2010년 투쟁 후 현재 해고자를 포함해 조합원은 1100명 정도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조합원들을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노조에서 두 번이나 재정비리가 터졌고 여러 가지로 굴곡이 많았다. 그래도 지켜주는 조합원들이다. 아무리 그래도 노조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고 하는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하청업체) 사장들이 와서 탈퇴하라고 협박하는 와중에도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노조에 몇 년 간 조합비를 내며 노조를 지키고 있다. 그래도 노조가 있어서 우리가 대우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조합원 수가 가장 많이 줄었을 때도 최소한 600명은 지켰다.

그런 조합원들이 이 투쟁을 만든 것이다. 지키고 끝까지 유지하려 한 조합원들이다. 저는 이 투쟁의 성과가 온전히 조합원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판결의 결과도 그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할 것이다. 그게 뭐든지 간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으나 어떻게든 찾아서 할 것이다. 빚을 갚아야 한다.

△7.22 판결 이후 한 차례 공장점거를 거친 비정규직 노동자들 투쟁 준비태세는?=조합원들이 희망을 갖고 지난 2010년 겨울 25일 간 파업투쟁을 전개했다. 조합원들 입장에서 이렇게 해도 안 되는구나 하면 그 다음에 싸울 때는 25일+α를 해야 하는데 그만큼 자신이 결의하고 마음 먹어야 한다.

제가 돌이켜 볼 때 가장 두려운 것은 2005년 2010년 파업을 선언하는 집회에서 조합원들의 눈이다. 조합원들은 지도부만 바라본다. 왜 우리가 이 투쟁을 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데 숨소리도 안 들릴 때가 있다.

기계가 철컥철컥 돌아가는 소리만 나는 가운데 조합원들이 나만 쳐다보는 느낌, 한편으로는 짜릿한 공포로도 느껴지곤 한다. 그만큼 조합원들이 알고도 모르는 척 속아주는 것이다. 지도부가 싸울 의지를 보이면 조합원들은 따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2005년에도 2006년에도 조합원을 믿고 가자고 했고 조합원들은 지도부를 믿고 함께 싸웠다. 조합원들은 늘 그런 모습을 보여줬다. 2010년에도 조합원들은 싸울 거라며 믿고 갔다. 1900명 중 1300명이 25일을 버텼다. 전 조합원의 2/3가 파업에 들어갔고 그 중 2/3인 600명 이상이 해고와 정직 등 징계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노조를 지켰다.

이번에도 그런 고민과 갈등의 시간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설득하고 지도부가 자기 태도를 명확히 보이며 준비하고 선언하면서 만들어간다면 이번에는 2010년 보다 더 긴 투쟁, 더 강력한 투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지회 지도부가 아니니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지회장을 비롯한 지도부가 조합원 1400명을 대상으로 4주 동안 주야간, 중식시간 등을 틈타 간담회를 진행했다. 아침 7시 출투부터 시작해 새벽 3~4시까지 지회 사무실에서 하루 3~4시간을 자면서 조합원들을 조직했다.

지도부의 믿음에서부터 사업이 시작됐고 조합원들 참여율도 높다고 자평한다. 비조합원들의 참여도 많다. (투쟁할 수 있는) 흐름과 분위기는 만들려고 애쓴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축적된 것이 어떤 계기를 통해 분출점이 만들어지면 터지는 것이다. 저는 분위기가 반전되고 있다고 믿는다.

노조활동 보장을 위한 출입투쟁이 있었고, 공장 안에서 집회를 보장받아야 해서 또 투쟁하고 있다. 지도부가 계속 고소고발을 당하고 있는데 조합원들은 강행하며 지켜내고 있다. 지회장을 비롯해 상집 간부 상당수가 집행유예 기간인데 그런 거 다 각오하고 나섰다. 그런 과정을 살고 있다. 조합원들이 그런 것을 다 알고 있다. 해보려고 하는구나 하고 믿어주는 조합원들을 우리는 믿고 간다.

옛날에는 식당 아주머니들도 정규직이었다. 1998년 IMF 이후 15년 간 착취당했는데 이제 우리 권리를 찾아야 한다.

▲ 2010년 11월19일 현대차비정규지회 조합원들의 현대차 울산공장 점거 당시 모습. 점거파업 5일차인 19일 오전 비정규지회 조합 간부들이 공장 한켠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다.이명익기자
현대차 생산직 비정규직 노동자가 8500명이라고 하지만 1차업체만 그렇고 2차업체에 1500~2000명 정도가 있다. 울산•전주•아산 공장 생산직 노동자와 식당 등 간접부서까지 하면 12000~13000명이 된다. 현대차 비정규직 12000명이 뭉쳐서 한 날 한 시에 일손을 놓으면 누가 공장을 돌리겠는가. 회사가 어떻게 12000명을 구하는가.

단결해서 투쟁하면 답은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은 결론적으로 제조업 사내하청 형태변화의 기준점이 될 것이다. 그런 책임의식도 가져야 한다.

우리만 생각해서 희안하게(잘못) 정리하면 다른 사업장들도 희안하게(잘못) 정리될 것이다. 현대기아차 결정사항은 금속노조 자동차산업 관련 제조업 일반 모두를 똑같이 정리하는 기준점이 될 것이다. 정신 차리고 똑바로 하면 좋겠다.

저는 올해밖에 기회가 없다고 본다. 출발은 법리적 판단에서 시작하지만, 법원 기준이 달라지면 투쟁의 양상도 달라질 것이다. 사회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은 총선 전 발표한 ‘가족행복 5대 약속 과제’ 중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한 핵심법안으로 사내하도급법이란 것이 있다.

민법상 도급 개념을 차용해서 사내하도급을 쓸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사내하청 관련해서 자꾸 분란이 생기니까 특별법을 만들어 새롭게 입법을 추진하려는 것이다. 이 법이 통과되면 현재의 사내하도급이 다 합법이 된다. 법원 판결은 계속해서 더 보수적으로 될 것이다. 국회 개원 후 100일 안에 한다니까 대선과도 연결된다.

그래서 투쟁하기에 올해가 가장 좋은 시기라고 한 것이다. 입법은 어떻게 될지 모르나 어쨌든 불리한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 기회를 놓쳐선 안된다. 정치적으로 봐도 대선 후보가 볼 때 자신의 공약에서 민생과 노동문제를 해결하는 관건은 재벌이 될테니 압력을 행사해야 하는 시기다. 어느 줄을 잡던 일정 정도 정치적 양보조치를 해야 기업도 편할 것이다. 국세청도 대기업 세무조사를 진행했고 정치적 국면으로 볼 때 활용할 가치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정세로 볼 때 입법적 법리적 우위에 있다고 보여지며,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핵심사업 의제로 올랐다. 판결도 있고 여론 역시 나쁘지 않다. 지금은 최대치의 투쟁을 기획하고 만들어야 할 때다.

△현대차지부 (정규직) 조합원들에게=정규직 조합원들에게 감사드린다. 창피하지만 정규직 민주노조가 있어서 사내하청노조가 명맥을 유지하고 생존할 수 있었다고 본다. 현대중공업에서 비정규직노조가 안정되지 못하고 현대차에서만 명백을 유지하고 있다.

다른 사내하청노조들의 경우를 봐도 명맥을 유지하는 곳이 어디에 있나를 살펴보면 정규직노조가 안정화돼 있고, 민주노조를 지향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현대차지부가) 그 존재 자체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했으면 좋겠다.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 좋겠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계속 늘어나고 채용되는 것은 99% 자본의 책임이다. 그것을 묵시적으로 용인한 노조에도 1% 책임이 있다고 본다. 정리해고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고용안정판이 필요했고 그밖에 여러 가지 조건과 환경이 있었지만 그런 과정에서 신규채용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묵인하고 용인한 1%의 책임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확인하고 법원 판결을 통해서까지 확정이 난 지금 더 이상은 묵인하지 않고 자신의 사업과 투쟁을 적극 만들어가면 좋겠다. 이것은 현대차지부에 하고 싶은 말이다.

조합원들에게는 정말 감사하고 고맙다. 우리가 파업을 하면 으레 벌금폭탄을 맞는다. 법원에 4억 정도의 돈을 갖다주고 있다. 우리가 돈이 어디 있는가? 다 재정사업을 해서 마련한다. 우리도 사지만 대부분 정규직 조합원들이 사준다. 파업 때도 옆에서 지지해 주고 도와줬다.

▲ 현대자동차비정규지회 최병승 조합원. 이명익기자
2010년 투쟁 때 정규직 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모금을 해서 거의 5000만원 되는 돈을 모아줬다. 또 야간조, 주간조 일할 때 나오는 빵과 우유 등 간식을 먹지 않고 모아뒀다가 파업하는 비정규직 동지들에게 갖다줬다.

제1공장 (정규직) 조합원들이 돈을 모아 필요한 거 사다주고, 족발이랑 양말이랑 사다줬다. 파업하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뭐라고 (투쟁하지 않는다고) 하기도 했다. 정규직 조합원들에게 한없이 감사하고 싶다.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다.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갈등이나 그런 것은 작업장 내에서는 어찌보면 이미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자본이 아무리 갈라지려 해도 한 반에서 10년을 같이 일한다고 생각해보라. 관계가 생기지 않겠는가.

좋던 싫던 10년 간 같이 일한 동생이 투쟁한다는데 뭐라도 해야지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 아니겠는가. 현장에서 정서가 아무리 어렵다고 하지만, 비정규직 문제는 회사 논리일 뿐이다. 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이고 다수가 일상에서 호흡하며 조화롭게 만들면 원하청투쟁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싶다.

△민주노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어려운 질문이다. 제 기억 중 하나를 말씀 드리자면, 전노협을 거쳐 민주노총을 건설해 96, 97년 총파업을 준비할 때 민주노총은 노동자의 조직이었고, 나의 조직이었다. 그리고 그 총파업투쟁을 헌신적으로 조직했다. 파업에 대한 이런 저런 논쟁을 차치하고 왜 총파업을 해야 하는지 조합원을 설득했다. 지난한 노력을 기울였던 기억이 있다.

그때 서울지역 중동구지구협의회에서 지역 단체들을 모아 노개투 대책위를 만들어 투쟁을 했다. 당시 저는 철 모르는 꼬마였다. 하지만 민주노총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정말 많았다. 1999년 수도권지역노조들이 수도권지역노조연대회의를 만들어 비정규직 문제를 포함해서 중소영세사업장의 핵심의제들을 해결하려고 했다.

▲ 울산은 노동자의 도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계급이 갈라놓은 계급의 도시이기도 하다. 2010년 현대자동차 비정규지회의 점거파업이 막바지에 이르던 12월8일 오후 전기가 나간 공장의 붉은 비상전구 뒤로 한 비정규지회 조합원이 휴대폰을 살펴보고 있다.이명익기자
지역노조들이 몰락하고 있었던 그 당시 연대회의가 단병호 위원장을 찾아가 면담을 하면서 특위를 구성해 활로로 모색해야 한다고, 중소영세사업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할 상설특위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단 위원장은 대의원대회를 거쳐야 하고 의결구조 속에서는 힘드니 중앙위 차원 특위를 만들어보자고 했고 비정규직 관련 모금부터 하자고 했다. 2000년 1월 정기대대에서 이런 내용들이 다뤄졌다. 민주노총 가맹 연맹들도 찾아가 간담회를 했다.

당시 금속연맹은 비정규직 영세사업장을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서 국제연대 차원으로 스웨덴노조에서 받은 돈을 주겠다고 했다. 그게 2000년 금속연맹의 태도였다.

2010년 5월 말 금속노조 미조직비정규국장으로 가서 보니 변한게 하나도 없었다. 지역노조와 사내하청에 오로지 돈을 주고 프로젝트를 하는 것밖에 없었다. 실제 노조가 기획하고 조직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

변한게 없고 똑같다. 민주노총도 마찬가지다. 전략조직화를 한다면서 돈 주는거 말고 하는 게 뭐가 있는가? 민주노총 차원에서 전략조직화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새로운 것이 없다. 지역에 자료 올리라고 해서 연맹별로 나눠먹기나 하고...

개인적으로 볼 때 변한게 별로 없다. 민주노총이 산별노조 체계로 가면서 민주노총이 내 조직이라는 생각이 별로 없다. 그래도 금속노조는 내 노조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이 민주노총 조합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은 것 같다.

파업을 해도 민주노총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자신의 행위와 태도를 해본 경험이 없으니 계속 잊혀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준비된 파업을 말하는데 준비를 했으면 행위를 할 때가 다가온다.

그 행위를 하면서 조합원이 자신의 조직임을 인식하게 해야 한다. 미조직비정규사업은 제 시선으로 볼 때 변한 게 없다. 지금까지의 과정과 내용을 평가하고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제대로 된 평가를 해보지 못한 것 같다.

공단 선전물 배포사업 역시 옛날부터 해 온 거다. 장기투쟁사업장이 도처에 많고 해고자들은 대부분 그 공단 다른 사업장에 다시 취업한다. 그런 사람들을 조직해서 옮겨간 사업장에서 핵심적 네트워크를 만들게 해야 한다. 그들처럼 노조에 애정이 많고 잘 아는 이들이 어디 있는가? 무작위로 선전물을 배포하는 것보다 그렇게 조직해 나가야 한다.

전략조직화를 한다면서 프로젝트만하고 훌륭한 인적 자원을 놔두고 사람을 뽑아쓰나? 비정규직 조합원들도 늘 그렇게 말한다. 그런 점을 잘 감안해서 활용한다면 지역조직화의 연결고리가 될 것이며 네트워크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내용의 문제제기를 금속노조 구미지부에 제출한 바 있다고 들었다. 다른 사업장 간 인적 네트워크 등 다른 방식 도입해 주요하다고 판단하면 인력과 돈 대지 않고 사업하라 하면 사기다. 주효하다고 판단하면서 인력과 돈을 대지 않고 사업하라고 하면 사기다. 돈과 인력을 투입하며 시작해야 민주노총이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가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당하다' 진실은 때론 진실이기에 잔인할 때도 있다. 현대차 비정규지회 조합원들의 공장 점거 파업 마지막 날 아침인 2010년 12월9일 오전. 공장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계단에 밟혀 있던 선전물에도 볕이 깃들고 있다. 하지만 현대차 비정규지회의 2010년 정규직화 파업 이후에 비정규지회에 돌아온 건 해고14명과 정직9명 등의 징계 뿐이었다. 이명익기자

이 기사는 분량을 줄여 <노동과세계> 종이신문 520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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