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일 보석출소 김정우 쌍용차지부 전 지부장 “분노를 삭일 수 없다”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전 지부장(55)이 지난 4월 1일 보석으로 출소했다. 출소 후 김득중 지부장은 충분히 쉬고 휴식을 취하라고 했지만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이 사방에서 연락을 해와 더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노동과세계>가 4월 15일 김정우 전 쌍용자동차지부 전 지부장의 부인이 운영하는 ‘상도포장마차’에서 김 전 지부장과 부인을 만났다. <편집자주>

▲ 김정우 전 쌍용자동차 지부장이 지난 4월 1일 보석으로 출소했다. ⓒ 변백선 기자
서대문 네거리에서 750B번 버스를 타고 40여 분을 달려 오후 4시 쯤 상도동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 내리자 바로 앞에 ‘상도포장마차’가 보였다. 김정우 지부장에게 전화를 했지만 계속 통화중이었다. 지부장의 부인이 가게 앞을 청소하며 하루 장사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민주노총에서 김정우 지부장님 뵈러 왔습니다.”
“네, 어서 오세요.”

대로변에 위치한 실내포장마차. 둥근 금속 테이블 5개. 메뉴가 하도 빽빽해 세어 보니 38가지나 된다. 안주 값은 굉장히 착하다. 15,000원부터 9,000원까지. 포장마차 메뉴가 이렇게 다양한지 새삼 놀랐다. 이걸 혼자 어떻게 다 만들어내고 손님을 치를까. 조금 기다리니 김정우 지부장이 들어왔다.

“저희 먼저 와 있었어요. 이 앞에서 전화를 드렸는데 통화 중이셨어요.”
“그래. 내가 전화를 했는데 안사람이 안 받더라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4월 1일 보석으로 출소하셨는데 저희는 며칠 더 걸릴 거라고 예상했었어요. 나오신다는 거 미리 아셨어요?”
“10분 전에 알았어. 난 4월 4일을 예상했어. 그날이 재판날이었거든. 변호인 접견을 했는데 4월 4일 쯤 기대해도 좋겠다고 했어. 지난해 6월 10일 들어갔으니까 9일 남기고 나온 거지.”

보석으로 출소했지만 조건이 붙었다. 3일 이상 다른 지역에 가거나 이사를 하게 되면 법원에 신고를 해야 한단다. 사실상 보호감호나 다름없다.

“너무 어처구니없게 구속이 돼서 분노를 삭일 수가 없었어. 내가 단식을 하고 회복식을 할 때였거든. 그 안에서 몸이 굉장히 아팠어, 스트레스가 심하니까 치아도 아팠고. 중부서 유치장에 있을 때 치아를 뺐어. 입이 한 달 가까이 헐어서 몹시 애를 먹었어. 두통도 심하고 어깨, 허리, 고관절까지... 이러다 병신 되겠구나 싶더라구. 하도 아파 한림대병원에 가서 MRI를 찍었는데 이상이 없다는 거야. 오랜 시간 아파서 병원에 다녔지. 12월 2일 재판에서 선고를 받고 크리스마스 때까지도 아팠는데 그 후에 마음을 비웠어. 그랬더니 씻은 듯이 낫더라구. 정말 분노를 삭일 수가 없었어.”

▲ 김정우 전 지부장은 어처구니 없게 구속되고 감옥에 갇혀 있는 내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기 힘들었다. ⓒ 변백선 기자
대한문 분향소를 강제로 철거당한 후 농성장을 지키기 위해 절규하던 그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감옥에 끌려가 겪었을 고통들... 그 과정을 담담히 풀어놓는 듯 보였지만 김정우 지부장의 세상을 향한 분노는 아직 진행형이다.

“운동을 하면서 체력을 보강하고 마음을 정진하려 했지만 한계가 있지. 뛰는 야생마를 우리에 가두니 견딜 수가 있어? 구치소 안에서도 싸움을 많이 했어. 거칠게 저항을 했지.”

김정우 지부장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지부장을 보고 싶어 하는 많은 이들이 면회를 가고 편지를 썼다. 김 지부장이 자신에게 온 편지를 아껴뒀다가 자기 전에 읽는다는 소문도 있었다.

“취침이 9시부터인데 10시가 되면 조도를 낮춰. 독서할 만큼은 돼. 불을 안 끄고 밤새 그렇게 환하게 해놓으니까 잠을 잘 못자. 그때가 되면 자기 전에 편지를 읽었어. 낮에 읽는 것 보다 마음에 더 와 닿고 생각을 많이 하게 돼. 그 살아나는 감정을 살려서 답장을 하기도 하고...”

김정우 지부장은 출소 후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투쟁이 일상인 이 노동자. 긴 단식 후 회복식을 하는 과정에서 구속이 됐고 견디기 어려운 스트레스에 오랜 기간 시달렸다.
 
“이젠 술도 못 먹겠어. 그냥 누가 주면 몇 잔 먹는 정도야. 그 안에 있을 때 담배생각이 절실했어. 볼펜이나 사루비아 과자 긴 거 있잖아. 담배생각이 날 때마다 그걸 입에 물고 연기 내뿜듯이 후~ 했지.”

▲ 김정우 전 지부장은 감옥에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고법 해고무효 소송에서 승소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 변백선 기자
김정우 지부장이 감옥에 있을 때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제기했던 정리해고 무효소송에서 승소(고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2월 7일 11시에 김성진 정비 사무장이 면회를 와서 ‘형, 재판에서 이겼어요’ 하는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쭉 나오더라구. 이틀을 울었어. 기쁨의 눈물을 실컷 흘렸지. 수감자들이랑 직원들한테서 축하도 많이 받았어. 그 사람들도 쌍용차 투쟁, 해고노동자들 문제를 내가 책임지고 있다는 걸 아니까. 인사를 며칠 동안 받았어.”

그는 2013년 2월 7일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2006년부터 상하이자동차가 쌍용차 기술을 먹튀했다고 현장에서 홍보물을 뿌리며 싸웠어. 그때부터 문제제기를 했는데 이제 결실을 맺은 거야. 회계조작이고 기획부도라는 게 국회 청문회에서도 나왔잖아. 국가권력의 잘못이었고 해고가 적절치 않았다고 재판부가 판정을 한 거야.”

쌍용차 해고노동자 28명이 길고도 긴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공장에 돌아갈 때까지 싸워야지. 2014년 안에 반드시 공장으로 돌아가야 해. 그 일념 하에 밀도 있는 투쟁계획도 세워야 하고. 정문 앞 1인시위를 계속 하고 있고, 5월 8일 해고를 통보한 날, 6월 8일 전체가 날아간 날을 기점으로 기자회견을 하고 교섭을 촉구할 거야.”

“쌍용차 문제는 노동자와 정부의 싸움이야. 그래서 정리해고 제도에 맞서 싸우는 거지. 거기서 파생된 문제니까 그걸 해결하라고 하는 거야. 해고 무효 소송에서 승소했고 사회 연대의 힘이 모아졌을 때 우리가 잘 싸워야 더 이상의 죽음이 없어.”

김 지부장은 96~97 노개투를 떠올린다. 쌍용차 정비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뛰쳐 나왔고 그걸 주도한 게 바로 김정우 지부장이었다.

“96년 말 노개투 때 명동성당에 가장 먼저 입성한 게 쌍용차 정비지부야. 내가 조합원들을 데리고 갔어. 기아차라고 알려졌지만 거긴 규모가 커서 그렇고 우리는 수는 적지만 가장 먼저 달려갔어. 그때가 내가 37살이니까 펄펄 날 때잖아. 지금도 성질이 불뚝불뚝한데 그때는 정말 길길이 날뛸 때지.”

▲ 김정우 전 지부장은 투쟁하는 모든 노동자에게 연대는 귀하고 소중한 생명줄이라고 말한다. ⓒ 변백선 기자
수년 간 해고노동자로 살아온 김정우 지부장은 누구나 그렇듯이 부인과 아이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함께 해 준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가정이 온전하지 못하면 운동도 힘들어. 어떤 활동가도 독신이 아닌 이상에는 어렵지. 해고된 쌍용차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야. 가정이 무너지면 특히 아내가 보살피지 않으면 계속하기 어려워. 아내가 내 든든한 지원군이지. 힘 빠진 나를 같은 마음으로 응원하고 격려해주는... 그러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올바른 마음으로 임해도 발목 잡히는 거야.”

김정우 지부장의 부인은 2011년 12월 상도동에서 실내포장마차를 시작했다.

“(포장마차가) 돈은 안 되고 힘만 들어. 여기가 술 마시다가 마지막에 한 잔 더하려고 오는 데잖아. 술 취해서 언행이 거친 손님도 많아.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도 많구. 남편이 해고됐는데 집에 저축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하니까 궁여지책으로 시작한 거야. 주변에서 많이 도와줬어. SNS로 알려내기도 했고. 그래도 힘들어.”

상도포장마차는 오후 3시경 장사준비를 시작해 4시 경 문을 연다. 보통 새벽 2~3시까지 영업을 하는데 손님이 늦게까지 있어 새벽 5시까지도 영업을 할 때도 있다.

“사모님께 많이 미안하실 것 같아요.”
“그럼 정말 미안하지. 내가 그림자한테도 절을 해. 여기 일을 도와 주려고는 하는데 투쟁이니 뭐니 해서 많이 바쁘니까 잘 못해.”

김정우 지부장은 1남1녀를 뒀다. 둘 다 20대로 장성했다. “내가 89년에 노조를 알았어. 그때 우리 아들이 1살이었잖아.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러고 다닌 거야. 그러니 아이들이랑 오붓한 시간도 잘 못가졌어.”

민주노총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으리라. “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누구 탓을 할 것 없이 스스로를 던지려고 하지 않잖아. 민주노총 사업장에서도 물론 그렇지만 간부 활동가들 사이에도 계급이 존재하는 것 같아. 그런 게 때로는 투쟁을 흐리게도 하고, 길을 어긋나게 만들기도 하지. 더 각성해야 해. 구호나 말로가 아니라 절박한 상황에서는 모든 간부들이 자신의 몸으로 느끼며 한계점을 돌파하기 위해 충실히 복무해야 해.”

“제대로 된 명분과 가치를 위해 치열하게 싸우면 붕괴되고 침체된 현장의 노동자들도 힘을 받을 거 아니야. 지켜보는 국민도 ‘민주노총 살아있네’ ‘그럼 민주노총 저 사람들이 저렇게 싸워야지’ ‘역시 민주노총이야’ 하는 말을 들을 거야. 그래야 하잖아.”

▲ 김정우 전 지부장이 노동과세계 보도일꾼들 먹으라고 밥을 퍼준다. 뒤쪽 주방에 김 지부장의 부인이 서 있다. ⓒ 변백선 기자
“내가 투쟁하면서 배운 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어떤 건가 하는 거야. 내가 남이 돼 봤나. 나는 나일뿐, 저들의 아픔을 잘 느끼지 못하잖아. 내가 그들의 아픔을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아. 큰 깨달음이지. 가슴에 저들의 아픔을 같이 품는 것. 그러려면 더 겸손해야 하고 치열해야 할 때는 더 치열해져야 해. 그게 내가 지금도 실천하는 거야. 25번째 죽음을 막기 위해서. 그 속에 희망도 녹아있어. 해고되고 5년 간 그리고 대한문 투쟁을 하면서 배운 거야. 세상은 혼자 살 수 없고 더불어 사는 거니까.”

“연대의 소중함을 모르면 안 돼. 투쟁하는 모든 노동자들, 길 위에서 아침 점심 저녁을 해결하는 동지들은 연대의 소중함을 알아야 해. 그 분들의 귀함, 소중함을 망각하면 자신의 생명줄을 놓는 거야. 연대는 생명이야.”

우리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사모님이 주말에 지부장 친가인 속초에 갔다가 사온 대게로 찌개를 끓여 상을 봐놨다. 김정우 지부장이 밥을 퍼주며 많이 먹으라고 권한다. 집에서 먹는 것 같은 맛난 반찬과 찌개가 얼마나 맛있던지 둘이서 찌개 한 냄비를 다 비웠다.

6시 쯤 되자 손님들이 테이블을 채우기 시작했다. 김정우 지부장은 친구가 운영하는 이웃 부동산에 가서 그릇을 가져오고 배달된 식재료 상자를 날라주고 이것저것 일을 돕다가 정비지회 조합원들을 만난다며 먼저 나섰다.

쌍용차 투쟁을 앞장서 이끌어 온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김정우 전 지부장. 출소 후 그는 특유의 형형한 눈빛을 반짝이며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현장으로 돌아가서 당당히 일하면서 투쟁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싸우고 있다. 쌍용차의 회계조작을 만천하에 알려내고 국가권력의 폭력에 쓰러져간 노동자들의 원한을 풀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며 목소리를 높인다. 이렇게 투쟁하는 노동자가 서 있는 그 자리, 그곳이 바로 민주노총이다.

▲ 김정우 전 지부장의 부인이 운영하는 '상도포장마차'.  ⓒ 변백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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