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카트’ 실제 주인공 이경옥 서비스연맹 사무처장

홈에버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조건과 파업투쟁을 그린 영화 ‘카트’가 화제다. ‘카트’는 실제 노동자들의 현장 점거파업을 상업영화로 만든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다. 영화 ‘카트’의 실제 주인공인 이경옥 서비스연맹 사무처장은 요즘 온갖 내신과 외신으로부터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에 정말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노동과세계>가 이경옥 사무처장(56세)을 만나 영화 '카트'를 본 소감과 2007년 홈에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대해 들어봤다.<편집자말>


▲ ⓒ 변백선 기자
△ 노동운동을 하게 된 계기, 그동안의 삶과 활동에 대해

= 제가 마트에서 일하게 된 건 1999년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장이 되면서 마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998년 12월 남편이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 병원에 갔지만 뇌에 오랫동안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식물인간 판정을 받았다. 충격이 컸고 병원에서 포기하라고 했지만 병원을 옮겨 양한방 치료를 같이 했더니 좋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두 달 후 오히려 심근경색이 와서 결국 사망진단서를 받았다.

1999년에는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추스린 후 벼룩시장 구인광고를 보고 ‘코티낭’이라는 프랑스 유통회사에 지원을 했다. 면접을 볼 때 난 가장이니 정규직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식·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가졌으니 정규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장이 저를 잘 봤는지 정규직으로 채용을 했다. 콘티낭이 99년 10월에 오픈을 한다고 했는데 예정된 날에 출근하라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중에 문을 열 때 보니 콘티낭이 아니고 까르푸였다. 저를 채용한 콘티낭이 프랑스 기업 까르푸와 M&A를 했던 것이다.

그렇게 까르푸로 전환을 해서 2000년 1월 까르푸 중계점이 문을 열었다. 정규직 여성 4명과 남성 관리자가 있었다. 제게 딸린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한국에서 그렇게 원스톱으로 운영하는 매장이 없었다.

카센터도 있고 모든 공산품과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한꺼번에 살 수 있는 매장이 없었다. 외국의 선진유통업체가 들어와 기존과는 다른 매장을 선보인 것이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밀려들었다. 직원도 많이 뽑았다. 작업실에 들어가 작업대에 줄줄이 붙어 작업을 했다. 프랑스 사람들의 진열방법이 있다. 빈약하게 놓지 말고 볼륨감 있게 물건을 쌓으라고 했다. 소비욕구를 불러일으키라는 것이었다.

제가 샐러드·샌드위치 코너 조장이 됐다. 정규직 조장을 세우고 밑에 비정규직 노동자 2~3명이 있었다. 정규직에게 작업을 지시하는 역할을 줘서 사람들을 관리하게 하고 같이 일하는 방식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20~30명 있었다.

처음에는 오픈빨 때문에 채용을 많이 하더니 매출이 서서히 떨어지자 한 두 사람씩 안보이지 시작했다. 3개월 6개월 9개월 계약서를 쓰고 수요가 없어지면 아웃시켰다. 정말 사소한 걸로 사람들을 해고시켰다.

오이 하나 집어먹다가 잘리고, 초밥 하나 먹다가 잘리고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점장을 비롯해 부장급 이상은 모두 프랑스 사람들이었는데 한국인과 정서가 다르다 보니 매장에서 뭘 집어먹는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이 해고 사유가 됐다. 게다가 계약직이 점차 필요 없게 되니까 자르는 핑계로 그걸 활용했다. 그렇게 울면서 나가는 노동자들을 지켜봐야 했다.

1년 쯤 지나자 소수만 남았다. 비정규직을 채용할 때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을 시켜준다고 해놓고 우리나라 사람들을 식민지 원주민 부리듯 했다. 그 사람들도 본국에 가면 모두 노동조합의 조합원인데 한국 사람을 얼마나 얕보고 업신여겼으면 그랬을까.

입사하고 1년 후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저는 노조가 있는지도 몰랐다. 말만 노동조합이지 전임자도 없었다. 한국노총으로 시작해 상급단체를 민주노총으로 바꿨지만 부당노동행위가 극심했다. 노조 위원장을 하다가 매장 내 중국음식점 등 푸드코트 점포를 하나씩 받아 나가곤 했을 정도니 말 다했지 않은가. 그만큼 노조 위원장에 대한 사측의 회유가 심각했다. 노사가 협상을 해서 임금인상을 공표하곤 했다.

제가 노동조합에 가입한 것은 2000년 5월이다. 그해 하반기 노사협의회 노동자측 위원을 하면서 그동안의 실체를 알게 됐다. 임금도 상당히 불만이었지만 가장 심각한 것 중 하나가 소모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작업장에서 음식을 만들고 일을 하는데 필요한 각종 물건들을 주지 않았다. 장화도 신어야 하고 고무장갑도 필요한데 안주니까 다른 부서 것을 뺏어다 쓰고 그랬다. 정육코너에 가서 뒤져서 달라고 하고. 장화에 물이 세서 비닐을 신고 일하기도 했다.

사람들 일을 부려먹으면서 연장 근무수당도 안주고, 자기들 매출목표를 달성하기에만 급급했다. 목표를 달성하면 다음날 미팅 때 과장이 수고했다고 하고, 달성 못하면 발로 걷어차고 집기를 던지며 위협을 했다. 나이 많은 여자들 필요 없으니 다 자른다면서 여성노동자들에게 모멸감도 줬다.

▲ ⓒ 변백선 기자
저는 회사에서 잘리고 싶지 않았다. 제가 스스로 나가면 나갔지 해고를 당해 쫓겨나기는 싫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들자고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노조가 있었던 거다.

3.1 독립만세를 외치기 위해 비밀리에 태극기를 품고 사람들을 모을 때 그랬을까. 몇 날 몇 시에 어디로 올 수 있니? 하며 조심스럽게 연락을 취했다. 회사도 아니고 매장에서 좀 떨어진 인근에서 만나 지부 설립총회를 했다. 신선식품, 정육, 수산, 농산, 베이커리, 떡집 등 부서들을 연락했고 나도 가마 나도 가마 해서 모였다. 중계지부로 정했다.

그렇게 시작했다. 지부 설립총회에 가보니 간부들이 모두 남성이었다. 뒤풀이 장소에 갔더니 저한테 여성부장을 하라고 했다. 내심 여성간부가 없어 불만이 있던 중에 제안을 받았지만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고민하고 대답하겠다 하고 일주일 후 여성부장직을 받아들였다.

저는 그때 활동을 시작하면서 끝까지 가지 대충 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노조 간부들이 다 결정된 후 중계점장에게 노조를 결성했다고 통보하고, 교섭하자고 했다. 프랑스 사람이 점장이라서 한국인 비서에게 지부장이 교섭공문을 전했지만 답변이 없었다.

그러자 남성 간부들이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노조 중앙에서는 위원장과 사무국장이 있어도 전임이 아니라고 지부 활동을 지원 못한다고 했다. 민주노총 서울본부와 북부지부협의회 조직부장이 같이 했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 그와 저만 남았다. 남성 간부들은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간부들이 모이지 않으니 회의를 할 수도 없었다. 결국 간부들 중 맨 마지막으로 간부직을 승낙한 저만 남았다.

회사가 간부들에게 “당신이 노조 간부야?”하며 협박하고 회유하고 그랬던 모양이다. 많은 간부들이 퇴사를 해버렸고 일부는 일을 하면서도 활동은 중단했다. 노조 중앙에서 와서 서비스연맹과 함께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했다.

여성부장이었던 제가 민주노총 전국민간서비스산업연맹 한국까르푸노동조합 중계지부 사무국장을 맡게 됐다. 지부장 제안이 있었지만 마트나 할인점 노동자는 대부분 여성이고 남성 간부에 대한 기대가 있다. 그래서 저는 사무국장을 하는 게 맞겠다 싶었다.

노사협의회에 같이 들어가던 다른 남성 노동자를 설득해 지부장을 맡게 했다. 그는 정규직이고 직급은 주임이었다. 저는 그 사람을 지부장으로 세워 역할을 맡게 했다. 간부들이 나가버렸는데 저는 그런 배신은 안한다고 했다. 지부장 역할을 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밀어줄 테니 날 믿고 하라고 설득했다.

당시까지 노동조합에 단협이 없었는데 우리 중계지부가 1차 단협을 체결했다. 비정규직 차별철폐 투쟁을 벌이고 간부 10명이 파업을 하고, 중계점 앞에서 2~3달 천막농성도 했다. 단식과 삭발만 안해봤다. 그렇게 투쟁을 한 지 300일 만에 단협을 체결했다.

전국매장 순회투쟁도 진행하고, 노학연대도 공고히 했다. 학생들이 전국 매장을 쳐들어가고 현장에서 피케팅을 하고 노조 가입을 독려했다. 그렇게 회사를 괴롭히는 투쟁을 끈질기게 했다. 전국 지역 동지들이 매장 순회를 함께 했다. 드디어 해고자를 복직시키고 단협을 체결했다. 그 과정에서 중계지부에 90여 명 조합원이 가입했다.

일산 몇 개 매장에서 조합원들이 집단 가입을 하자 회유와 탈퇴공작이 자행됐다. 부당노동행위도 빈발했다. 단협도 없는 상황에서 회사가 노조 체크오프를 해준다고 조합원 명부를 달라고 해서 줬는데 그 명단을 갖고 회유공작을 했다. 통장에 들어오던 조합비가 점점 줄었다. 노동부에 진정서를 넣어 명부를 받았지만 이미 우수수 다 탈퇴한 후였다.

2002년 4월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노조 가입을 받으면 회사가 부당노동행위를 계속했다. 우리는 그동안 부당노동행위 한 것을 고발해 약식판정으로 벌금형을 받게 하고 점장을 본국으로 날렸다.

노조 창립 기념품으로 볼펜을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게 했다. 노조 홈피도 만들어 주소를 알려주며 조합원들과 소통을 강화했다. 회사가 긴장해서 노동자들을 불러 볼펜을 떼라고 하는 걸 녹취해 부당노동행위임을 인정받아 점장을 프랑스 본국으로 쫓아낸 것이다. 노동조합에 함부로 하면 안된다는 것을 직원들이 알게 됐고, 단협을 체결하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다국적 기업이 한국에 들어와 횡포를 일삼는 것에 분노했고, 근로감독과장을 동원하며 압박했다. 최종 지부장과 제가 교섭에 들어가 타결시켰다. 생각해보면 그때 그렇게 한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

사실 당시 체결한 단협의 내용은 미미한 것이었다. 조합원 50여 명이라고 해야 전체 직원의 몇%밖에 안 됐다. 전임 지부장이 28시간을 받고, 노조 사무실과 간부 유급 회의시간, 그 외에는 없었다. 노조를 인정하는 정도였다.

파업 직전인 2002년 12월 노조 중앙 사무국장과 중계지부 사무국장을 떠맡았다. 300일 파업을 하던 중에 중계지부장은 중앙 위원장까지, 저는 중계지부 사무국장 겸 노조 중앙 사무국장을 다 맡았다.

이어 중동지부 투쟁이 촉발됐다. 이랜드 홈에버 투쟁 당시 위원장이었던 김경욱 위원장. 보안 안전팀과 몸싸움을 하며 중동지부 조직을 확대했다. 중동 조합원 가입서가 들어오자 김경욱 동지가 팩스를 보내왔다.

▲ ⓒ 변백선 기자
당시 중동지부를 만들어 이학범 지부장과 김경욱 사무장이 간부가 됐다. 중동점에 새로 부임한 과장이 비정규직과 협력업체 직원들을 더 챙기자 정규직이 기분 나빠했다고 한다. 우리가 복귀하고 한 달 후에 중동지부가 투쟁을 시작했다.

2003년 4월 중계지부가 단협을 체결한 후 이어서 5월 중동지부가 파업에 나섰다. 중동점으로 출근해서 새벽 1시 넘어 집에 가는 그런 생활을 70여 일 했다. 조합원 80여 명이 가입했고, 비정규직은 물론 정규직 과장까지 가입할 수 있게 노조 규약을 열었다.

비정규직도 파업에 동참했다. 우리는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비정규직을 해고시킬까봐 조마조마했다. 전면파업을 20일 정도 하다가, 지부장과 사무장, 조합원들이 회의를 열어 이렇게 가다가는 노조가 깨질 수 있다고 해서 현장에 복귀했다.

현장에 복귀하면서 단체복을 만들어 사복투쟁을 시작했다. 돈이 없어 조끼는 못 만들고 티셔츠를 맞춰 입었다. 조합원들은 이런 투쟁도 있네 하며 신나했다. 핫팬츠도 입고 반바지며 슬리퍼 차림 등 다양한 투쟁을 진행했다. 전면파업 때 중동점을 직장폐쇄까지 했는데 그걸 풀게 했다.

협력업체가 해고한 직원들도 투쟁에 동참했고 고용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며 노동조합이 완강하게 싸웠다. 마트 간접고용의 경우 매대를 빼고 본사에 보내 할 일이 없다는 이유로 해고하는 방식을 취했다.

당시 해고될 줄 알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아직도 한국까르푸 1호점인 중동점에서 일하고 있다. 노사 타결로 1996년 한국에 까르푸가 들어오고 8년 만에 식대와 교통비를 1만원씩 올렸다. 식대라고 해봐야 얼마 안 되고, 매장 푸드코트에서 먹으면 비싸니까 노동자들은 도시락을 싸갖고 다녔다.

까르푸는 정서상 직원식당을 직원들이 이용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푸드코트 직원할인도 받아내고, 밤늦게까지 일하는 경우 집까지 거리를 산정해서 택시비도 주게 했다.

회사는 노조중앙과 중동지부 간부들에게 1인당 9,900만원씩 손배를 청구했다. 노동조합이 투쟁을 제대로 하려면 계산대를 멈춰 돈줄을 죄야 한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그 다음에는 계산원들을 조직해서 중동점 파업을 했고 조합원 80여 명이 끝까지 남아 투쟁을 마무리했다.

전원파업 과정에서 조합원이 늘어 100명을 넘어섰다. 점장을 날리고 지부 조직은 탄탄해졌다. 위원장이 사퇴하고 김경욱 당시 사무장이 보궐선거로 당선됐다. 김 위원장은 구조조정을 하라는 회사 지시를 거부하고 조합원들을 가입시킨 사람이니 사측은 김경욱이 위원장이 되는 것을 경계했다. 1차 단협 때 부속합의서에 김경욱이 차기 위원장이 되면 안 된다는 조항을 넣었을 정도다.

저는 이 사람을 위원장으로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밀리에 보궐선거를 진행해 회사 모르게 김경욱 위원장을 당선시키고 공개하자 회사가 놀라 뒤집어졌다. 파업 후 조합원 100명을 만들고 계산원을 조직해 계산대를 멈추는 투쟁을 하자고 했다.

중동지부 투쟁은 지도부와 조합원이 전면파업을 벌인 최초의 사례였다. 다음에는 전국에 지부를 건설해 매장을 세우고 우리 지도부는 장렬히 전사하자고 했다. 우리 요구를 걸고 싸워 목표를 달성하자고 다짐했다. 1,000명을 조직하자고 했다.

두 번째 단협을 준비하며 고민한 것은 주 40시간 쟁취였다. 주 50시간을 40시간으로 줄이고 기본연장근무 수당을 기본급에 포함시키자고 했다. 2005년 두 번 째 단협 때는 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비정규직을 가입대상에 포함시키고 CMS를 조직했다. 소수 조합원이 있는 매장들은 서울본부로 가입시켜 비공개로 보호했다.

조합원 명단을 공개하지 않고 철저히 관리했다. 매장에서 만나도 서로 모른 척 하고 인근 떨어진 곳에서 따로 만났다. 그러다가 조합원이 20~30명 정도 되면 지부를 건설하고 공개하며 조직을 확대해나갔다.

‘유니’라는 국제노동단체와 까르푸가 국제협약을 맺은 게 있다. 그 협약을 보면 까르푸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는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글로벌 기업이기 때문에 어느 나라든 당연히 적용이 된다.

그 협약을 이용해 유니와 유니한국협의회 사람을 불러다놓고 회사에게 협약을 지키라고 설득했다. 2006년 2차 단협 때 비정규직을 조합원으로 포함시킨다는 데 합의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조합원이 각각 절반이 됐고 1,000명이 넘어 조직사업에 성공했다.

당시 매각이 될 거라고 해서 그에 대비해 단협에 고용승계와 고용보장 조항도 넣었다. 유사시 매각되는 경우 고용을 승계하고 보장받아야 했다. 부산 순천 울산 해운대에서 총회를 열어 2006년 체결한 단협에 대한 조합원 찬반투표를 하는 과정에서 매각이 발표됐다.

회사는 그 전까지 매각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다. 인수회사는 최악이었다. 이랜드가 매각한다는 것을 알고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다. 다른 곳보다 훨씬 많은 금액인 1조3천억을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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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랜드그룹에도 노동조합이 있었다. 이랜드노조와 뉴코아노조, 까르푸노조가 공동투쟁본부를 만들어 싸우자고 했다. 까르푸노조는 조합원이 1,000명이 넘지만 이제 겨우 두번째 단협을 체결한 허약한 노조였다. 게다가 비정규직 투쟁 경험이 없는 조합원들이었다.

뉴코아 정규직 노조와 이랜드노조에 지원을 요청했고 공동투쟁본부를 꾸렸다. 각 매장들 리뉴얼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직원들을 전보발령하고 전환배치를 했다. 이 기회에 조직을 확대하고 조합원을 단련시키자고 해서 회의와 교육을 많이 했다.

각 매장마다 버스를 대절해서 시흥 본사에 가서 교육도 했다. 당당한 노동조합의 위상을 보이며 이랜드가 지독한 회사라는 경각심을 조합원들에게 알렸다. 광흥창역에 있는 이랜드 본사에 세 노조가 쳐들어가기도 했다. 뉴코아 조합원 1500명, 까르푸노조 1000명, 이랜드노조 50명 등 2500명 중 휴무자를 조직해 기본대오 500명 이상이 계속 투쟁을 벌였다.

까르푸노조 40~50대 나이든 조합원들과 뉴코아 젊은 조합원들이 뭉치니 힘이 됐다. 2006년 공동투쟁본부를 꾸려 싸우다 일부가 먼저 타결하고 들어가기도 했다. 소통이 잘 안되는 상황에서 선타결되는 사업장이 생기자 통합을 고민했다.

뉴코아 정규직노조는 단협이 잘 돼 있고 재정도 여력이 있었다. 통합하는 순간 기득권을 내려놔야 하는 상황이었다. 조합원 투표를 했더니 뉴코아노조와 통합하고 싶어 했다. 2007년 1월부터 모여서 세 노조가 의기투합해 싸워 그 결과물을 보고 통합해도 된다고 했다.

결국 까르푸노조와 이랜드노조가 통합을 결정했다. 까르푸 중계점과 중계2001아웃렛이 같은 인도상에 있었는데, 여기에 천막을 치고 이랜드그룹이 한국 까르푸를 인수한 후 벌이는 행태들, 수면실을 없애고 기도실을 만든 것 등을 폭로하며 선도투를 하자고 했다.

첫 단협을 체결한 중계지부와 잘 싸운 2001아웃렛 현장에서 다시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2006년 12월 통합 후 규약을 만들고 이랜드일반노조를 만들었다. 당시 까르푸가 전환한 홈에버지부 조합원이 1200명, 이랜드지부 조합원이 50명이었다. 홈에버지부 김경욱 위원장, 이랜드지부 이남신 수석부위원장, 홈에버지부의 저(이경옥 부위원장), 이랜드지부의 홍윤경 사무국장 등 4인이 통합지도부를 꾸렸다.

2007년 6월 23일부터 2008년 11월 13일까지의 510일 파업투쟁을 잊을 수 없다. 처음에는 1박2일 하자고 들어갔는데 돈이 없어 뉴코아 조합원들 먹고 남은 도시락을 먹었다. 통장 잔고가 없어 첫날밤에는 도시락을 얻어먹고 다음날부터 솥단지를 걸어 밥을 해먹었다.

회사가 노조를 깨겠다면서 할 테면 해보라고 하니까 조합원들이 그래? 그럼 우리도 끝까지 가자고 했다. 조합원들 스스로 민주적으로 의견을 내면서 가자 가자 했다.

7월 20일 끌려나왔는데 그날 침탈한 이유가 기가 막혔다. 월드컵 경기장에서 A매치 경기를 하는데 우리가 보기 싫다고 끌어냈다.

△영화 ‘카트’를 보며 어떤 느낌을 받았나?

= 노동자들의 실제 파업투쟁을 상업영화로 만든 사례가 국제적으로도 처음이라고 들었다. 우리 투쟁과 100% 똑같지는 않으나 몇 꼭지 똑같은 내용이 있다. 점거농성하면서 계산대 엎에 박스를 깔고 잠잘 때 정말 행복했다.

당시 20일 간의 점거농성은 510일 파업으로 가는 큰 동력이 됐다. 홈에버 상암점은 한국 1등 매장이었다. 매출이 최고 높았다. 우리 조합원들은 일하면서 식사를 자주 걸러 위장병도 앓았고 방광염으로도 고생했다.

파업에 함께 했던 조합원들이 우리끼리 영화를 보면서 물대포가 우리가 당한 거에 비하면 너무 약과라고 했다. 용역깡패들이 천막을 철거하고 공권력이 계단을 뛰어내려오던 당시의 기억들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우리가 아침밥을 먹다가 그 일을 당하지 않았는가.

공권력 침탈 상황은 표현이 잘된 것 같다. 마지막에 카트를 밀고 다시 나가는 장면도 똑같다. 조합원들이 지도부를 압박하며 고강도투쟁을 하자고, 점거농성을 해야 한다고, 이랜드가 대화에 나서게 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던 게 정말 기억에 남는다.

끌려나온 후 점거는 2차 3차 계속됐다. 6월 30일 세 번째 점거 때 월드컵 면목점에 들어가 영업을 정지시켰다. 매장을 진짜 멈추고 눌러앉았다. 우리가 매장의 주인임을 보여주자고 했다. 당시의 해방구와도 같은 장면들이 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겼다.

점거농성을 하면서 매장에서 줄넘기도 하고, 체조도 하고 공놀이도 하고 그런 모습들도 진짜 우리가 했던 것들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깨끗이 청소하고 줄을 맞춰 앉아있었다. 매장 물건들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김강우 씨가 해고된 후 노조를 같이 만들어 투쟁하다 구속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설정에서 조합원들은 위원장이 너무 나약한 인간으로 보여지는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 영화가 잘됐으면 좋겠는데 상영관이 별로 없다. 상영관이 없으면 영화사에 연락해 대여해서 볼 수 있다고 한다. 학교 등 공동체 상영을 추진하려고 한다.

조합원들이 당시 가장 힘들어했던 것이 지금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경제적 어려움보다도 가족관계가 가장 힘들었다. 아이들은 적극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반대자로 조합원들 발목을 잡은건 남편들이었다. 집회를 하다가도 남편 밥해줘야 한다며 들어가야 하는 조합원들이 적지 않았다.

▲ ⓒ 변백선 기자
△2007년 파업투쟁을 자평한다면?

=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연대해 싸운 투쟁이었다. 그것도 전국적으로 벌인 연대투쟁이었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다양한 이들이 우리 투쟁을 도와줬다. 하물며 당장 법률소송을 하려 해도 민변 변호사들이 달려와 도와줬다. 상급단체인 민주노총과 서비스연맹이 함께 했다. 민주노총 조합원 전체가 우리를 지원했고 시민들은 전국에서 불매운동을 벌이며 전국적 연대를 꾸려냈다.

또 노동운동 역사상 합법파업으로 최장기 파업이었다. 집행부와 조합원이 끈끈한 의리로 함께 시작해 함께 마무리한 투쟁이기도 했다.

△홈플러스와 이마트 노동조합에 대해, 또 마트노동자 조직화사업과 이후 계획에 대해

= 이마트에는 3개의 노조가 있다. 우리 민주노조 외에 2노조, 3노조가 있다. 민주노조를 무력화하기 위해 회사가 만든 거지만, 노동자들은 어떤 노조가 제대로 된 노조인지 잘 알고 있다.
3노조는 노사협의회 수준이며 사규를 따른다는 내용의 단협을 갖고 있으니 말도 안 나온다. 조합원은 현명하다. 열심히 하면 현장은 답을 한다. 까르푸 때처럼 차근차근 조직사업을 벌여나가고 있다.

홈플러스테스코는 반노조적 회사다. 100% 영국자본인 홈플러스 한 회사에 2개의 노동조합이 있다. 홈플러스테스코노동조합과 홈플러스노동조합이 있다. 한국기업이 더 지독하다는 걸 또다시 깨닫는다.

문제는 재매각설이 불거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발 경기침체 여파로 테스코가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말이 있다. 유니레버가 구조조정의 달인을 영입해 한국 유통재벌 그룹들을 만나고갔다고 한다. 매각이 뭍밑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예상된다.

두 회사 매장 33개와 102개 두 덩어리를 합치면 총 135개인데 10조를 주고 인수할 곳이 없어 전체를 매각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 매각을 할 수도 있다. 정말 팔자도 기구하다. 또 매각투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미 매각설이 기사로 나오고 있다.

우리 조합원들은 매각을 2번이나 경험했기 때문에 전조증상을 눈치로 안다. 물류센터에 물건이 없고 매장에도 마찬가지다. 매출을 올리기 위해 귤을 1+1 행사를 한다. 매출을 올려 매각대금을 올리려는 것이다.

△경비노동자가 분신해 사망하는 일이 있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곳곳에서 투쟁하고 있는데

= 저도 큰 충격을 받았다. 제가 사는 아파트단지 몇 년 전 입주자대표회의서 공고문을 붙였다. 경비노동자 관련 설문조사를 하고 입주자에게 찬반을 묻는 서명도 했다. 경비 없애는 문제를 놓고 사인을 받는데 저는 절대 반대라고 했다.

경비노동자가 일을 엄청나게 많이 한다. 그러지 않으면 도난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주변도 어지러워지는데 그러면 그 일을 모두 입주자가 해야 한다. 최저임금을 주기 위해 관리비가 조금 인상되는 걸 갖고 이분들 일자리를 빼앗아 하루아침에 해고하는 것은 안 된다고 했다.

다행히 저처럼 반대하는 입장에 선 사람들이 많아 해고되지 않고 일하고 있다. 제가 노원에 사는데 거기 아파트 단지가 엄청나게 많다.

신현대아파트 분신사망 사태 이후 저는 더 깍듯이 인사를 하고 다닌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인격을 모독하고 회사가 직원을 생각하지 않고 일회용 소모품으로 대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마음대로 일을 시키고 부리다가 자기들 마음대로 자르는  이 세상이 너무 서글프다. 경비노동자들이 그 아파트를 위해서, 제일 비싼 아파트 값이 나가게 해주려고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는가. 하물며 한국사회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상식을 말하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나.

아마도 그 아파트에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많이 살 것이다.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똑같이 그 나물에 그 밥으로 소외되고 어려운 이들을 눈꼽 만큼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해고요건을 더 완화하겠다고 한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고 살아야 하는가?

정규직 해고요건을 완화하려는 것에 대해 정규직 비정규직이 연대해 투쟁해야 한다. 비정규직을 용역으로 전환하고, 외주화 한 후에는 정규직 차례다. 비정규직은 더 나빠질 게 없다. 이미 바닥에 있다. 많이 가진 정규직들은 상실감이 더 클 것이다.

이번 기회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연대해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고 임금도 하향조정이 아니라 쌍끄리로 끌어올려야 한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연대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이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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