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직장인들의 애환을 담은 미생이란 드라마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 첫회에서 주인공인 장그래의 대사 중에 ‘길이란 걷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나아가는 것이며 나아가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4일 열린 ‘노동시장 구조 개선 관련 토론회’에서 축사하면서 첫머리로 한 말이다. 그는 뜬금없이 왜 이런 아리송한 말을 했을까? 이 장관은 노동시장의 구조를 개선하되 현재의 틀을 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지금으로선 비정규직을 아예 없앨 수는 없으니 처우를 개선하고 차별받지 않도록 보호해주면서 점진적으로 가자는 것이다. 현대자동차 불법 파견 판결은 비정규직을 없애라는 주문이지만, 고용노동부는 적극적인 행정조치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비정규직을 돕겠다고 하는 명분으로 제기하는 것이 사용제한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는 방안이다.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2년보다는 3년을 선호할 것이라는 이유다. 물론 확정되지 않았지만 정책 의지는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2009년 정부가 이른바 ‘100만 해고 대란설’과 함께 비정규직 사용 기간을 4년으로 늘리려했을 때의 노동부 담당 국장이 이 장관이었다.

당사자 의견이라는 것은 단순할 수밖에 없다. ‘2년 일하고 그만 둘래, 아니면 1년 더할래?’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기간을 연장해달라고 답할 게 뻔하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혹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을 염두에 둔다면 사용기간을 늘릴 이유가 없다.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당사자 의견 최우선’이란 수사는 비정규직의 불안하고 불리한 현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인식 위에 서 있다.

비교적 숨겨진 이슈는 사내하도급 보호법이다. 2012년 새누리당이 이른바 ‘민생법안 1호’로 제출했다. 사내하도급을 법적인 고용 형태로 인정하고 구체적인 노동조건을 원·하청 계약서에 명시하도록 한다.

사내하도급을 적극적으로 보호한다는 외피를 쓰고 있지만, 불법 파견 논란의 탈출구 구실을 할 가능성이 크다. 사내하도급은 일반적인 도급이나 용역과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재계의 시각과 궤를 같이 한다. 노동부가 비정규직 대책에 포함시킬 것으로 예상되는 사내하도급 관련 내용은 이 법안을 지지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10여년 간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싸워오면서 최근 불법 파견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가장 분명한 사내하도급 정책은 ‘법에 따라’ 정규직화시키는 것인데, 정부는 다른 속셈을 가진 듯하다.

또 ‘정규직 과보호’를 완화하겠다는 게 정부의 생각이다. 성과가 낮은 직원은 보다 손쉽게 해고시킬 수 있도록 기준을 분명히 하고, 오래 다닐수록 급여가 올라가는 임금 구조를 깨뜨리면 일자리가 늘어난다고 호도한다. 위를 끌어내려 아래를 올리자는 얘기인데, 기업의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경제’를 최고의 가치로 보고 이를 기업의 손익계산서로 가늠하려는 것은 주류의 시각이 된 지 오래다. 그래서 10대 그룹 내에 쌓여있는 사내유보금이 537조원이다. 기업의 이익이 국민의 이익과 직결되지 않는다는 얘기는, 이제 입이 아프다. 그럼에도 또 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 서글플 정도다.

세계적으로 기업의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소득 증대가 가장 본질적이고 확실한 경제 발전책이라는 공감대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런데 유독 한국은 ‘새마을운동’ 시절로 회귀했고, 노동자가 위태롭다. 박근혜 정부는 ‘나아가야 할 길’을 마다하고 있다.

박철응/경향신문 기자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노동과세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