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계신 분들도 현대중공업에 근무를 한다면 24시간 감시의 대상이 됩니다. 무서운 조직입니다.” 2011년까지 현대중공업에서 운영과장(노무 담당)을 지낸 이재림씨의 얘기이다.

민주노조가 들어서지 못하도록 대의원 선거를 통제하고 민주 성향 조합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왔다는 것.

“집에 가서 씻을 때까지 추적, 감시합니다.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나고 소주는 얼마를 마셨는지.” 이런 행태가 최근까지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 엊그제 추가로 폭로되었다. 현대중공업 노조와 사내하청지회가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현대중공업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문서를 공개한 것. 이 문서는 작년 대의원 선거에 출마한 조합원들을 R(레드=민주), Y(옐로=중도), G(그린=사측)로 분류하고 있다.

“신규노조 가입 인원이 최근 1주일간 1명도 없는데 어떠한 활동을 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점검하라. … 9월20일까지 220명, 9월30일 250명, 10월10일 290명 목표로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1명도 없는 이유가 뭔지 강하게 전달하라.” 현대자동차 최모 이사대우가 부하 직원들에게 보낸 ‘유성동향 일일보고(9월19일)’라는 제목의 e메일 내용이다. 금속노조에서 탈퇴해 기업노조로 새로 가입하는 노동자가 적다고 지적한 e메일 내용을 보면, 현대차가 부품사인 유성기업에 조직된 민주노조 파괴를 위해 매우 구체적인 지시를 해 왔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부품사에 대한 노무관리가 이 정도라면 직접 고용한 노동자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현대차를 판매하는 영업노동자에 대해 국내영업본부 인사실 차원에서 지속적인 미행과 감시가 진행된 바 있다. 업무시간에 동호회에 참석하거나 당구장 또는 PC방에 있었다며 해고하는 사건이 줄을 이었다. 영업노동자의 경우 다양한 판촉 활동을 펼치기 때문에 위의 사실관계만으로 근무태도를 평가할 수 없음에도, 조합원의 일거수일투족을 미행·감시해 왔던 것이다. 최근에 같은 현대차그룹에 속한 현대제철 당진공장에서도 노조 간부에 대한 사찰 문건이 폭로된 바 있다.

현대차그룹과 현대중공업, 한국 재벌 순위 각각 2위와 7위를 차지하는 대기업들에서 미행·감시·사찰 관련 사건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 그룹에서 최근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대강의 전모를 알 수 있다. 현대중공업에서는 재작년부터 사무일반직과 고졸 여사원 수천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이라는 형식으로 인위적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퇴직을 거부한 과장급 직원 1000여명에 대해 원격지 발령, 업무용 PC 치우기, 경고장 발송을 남발했고, 끝까지 버티는 직원들에게는 ‘업무향상교육(PIP)’을 일방적으로 시행하며 사실상 퇴직을 종용한 바 있다. 박근혜 정권이 밀어붙이는 ‘저성과자 해고’ 프로세스를 그대로 밟았던 것이다.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소속인 영업노동자들에 대해서도 최근 저성과자 해고 문제가 전면화되고 있다. 지난 3월8일 열린 노사협의회 상견례 자리에서 현대차 사측이 17명의 조합원들을 저성과자라며 징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미 현대차는 66명의 조합원들에게 저성과자라는 핑계로 경고서한을 발송한 바 있으며, 생산성 향상 교육을 실시하겠다고 통보했다. 현대중공업에서 벌어진 일들을 똑같이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3월17일에는 유성기업의 민주노조 탄압에 시달리던 한 조합원이 목을 매 자결하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배후에는 유성기업의 원청인 현대차의 지휘가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같은 날 현대차 노사협의회 상견례 자리에서 회사 측은 임금피크제 시행 확대를 들고나왔다.

현대차 노사관계가 가진 파급력을 감안할 때, 이는 부품사를 비롯한 자동차산업 전반으로 확대하겠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즉, 현대차그룹과 현대중공업에서 폭로되고 있는 미행·감시·사찰 사건들의 종착역에는 임금피크제, 저성과자 해고 등 박근혜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노동개악이 놓여 있다. 민주노조가 서 있는 사업장들에서 폭로되는 내용이 이 정도일진대, 노조조차 없는 다른 사업장들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이 2개 그룹이 아닌 다른 재벌사들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공정해고.’ 박근혜 정부가 행정지침으로 발표한 저성과자 해고에 대해 노동자들이 ‘쉬운 해고’라는 딱지를 붙이자 이렇게 말을 바꿨는데 표현이 참으로 얄궂다. 공정한 해고라니? “해고는 살인”이라는 익숙한 슬로건을 떠올린다면 공정한 살인도 가능하단 말인가. 이런 표현을 정부가 사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저임금과 비정규직, 실업에 허덕이는 청년들의 분노가 ‘불공정’이라는 말에 꽂히고 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정해진다는 흙수저·금수저, 청년에겐 이미 이 나라가 지옥이나 다름없다는 ‘헬조선’ 등의 말에는 한국 사회의 불공정 행태에 대한 분노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하지만 이른바 ‘공정해고’를 밀어붙이는 재벌들의 행태야말로 공정함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 공정한 해고가 아니라 조합원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꼬투리를 잡는 등 ‘해고 공정’을 밟고 있을 뿐이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악 최대 수혜자가 재벌이라는 사실이 입증되는 대목이다. 재벌들이 노동개악을 밀어붙이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수백조원의 사내유보금을 갖고 있는 재벌들이 이 정도라면 대부분이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을 청년들을 고용한 사업주들은 어떠할까.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이 있었던 것처럼 총선을 앞두고 ‘공정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전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금호아시아나 재벌이 아시아나 기내 청소노동자들이 만든 노조에 ‘아시아나’라는 말을 쓰지 말라는 거액의 손배소송(갑질 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공정한 사회를 위해 노동개혁이 필요한가 재벌개혁이 필요한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3232115445&code=990100

 [ 이 칼럼은 경향신문에도 게제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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