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장을 확실히 얘기할 수 있게 된 것” “굉장히 추운 겨울 새벽 집회에 얼마 없을 줄 알았던 조합원들이 모두 나와 있을 때” “가입을 망설이는 비조합원을 가입시킨 일” “관리자들이 조합원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양심과 소신을 갖고 생활한 것”.

어떤 질문을 했기에 이런 답들이 나왔을까? 한 노동조합이 실시한 설문조사 중 ‘노조에 가입한 후 가장 보람을 느끼고 기억에 남는 일’을 묻는 문항에 조합원들이 직접 적은 답변들이다. 당시 설문지 설계에 참여했었는데 결과를 보고 적지 않게 놀랐던 기억이 난다.

객관식 중심의 설문지에 끼워 넣은 주관식 설문인데 100여명 조합원이 빠짐없이 답을 적었다는 점도 놀랐지만, ‘임금이 올랐을 때’ ‘고용안정을 실현했을 때’라는 답은 찾아볼 수 없고 위와 같은 답변이 대부분이라는 점에 더 놀랐다. 교과서는 노동조합이 임금 인상과 고용안정을 위해 존재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게다가 사례로 든 노동조합은 100% 비정규직으로 구성된 노조였다. 설립된 지 10년이 넘은 이 비정규직노조는 그동안 임금 인상도 상당히 이뤄냈고, 다수가 해고된 적도 있으나 상당수 복직을 따내며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런데 가장 보람을 느끼고 기억에 남는 일 중에 임금이나 고용에 대한 답이 없다니?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부터 다른 노동조합 교육을 다닐 때마다 조합원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놀랍게도 거의 똑같은 답변들이 나왔다. 비정규직만이 아니라 정규직 조합원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아니, 노조에 가입한 후 임금이나 고용을 지켜서 좋았다는 답은 없나요?”라고 되묻자 조합원들 스스로도 놀라는 눈치였다.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에는 직장 동료들과 술 먹는 것도 조심해야 했죠. 회사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는데 다음날 관리자들이 그 얘길 다 알고 있더라고요. 직장 동료를 의심해야 하고 경쟁 상대로 느낄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노조가 생긴 뒤에는 분위기가 확 달라졌어요. 관리자들이 뭐라 윽박질러도 함께 맞받아칠 동료들이 있다는 걸 확인한 거죠. 가족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평생 동지’를 얻은 겁니다.”

노동조합법에 따르면 노동조합이란 노동조건의 유지·개선 및 노동자의 경제·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하는 단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평범한 조합원들이 말하는 노동조합의 참된 의미를 들어보면 법에 명시된 내용은 협소하기 그지없다. 우선 나부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는 혼자일 때엔 힘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화 <친구>에 등장하는 카피(“함께 있을 때 우린 두려울 것이 없었다”)처럼 여럿이 단결하면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낸다.

노동자 단결의 가장 대중적인 형태인 노동조합이 결성되면, 노동자들은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대화를 시작한다. 대화를 하면서 각자가 겪고 있는 고통이 특수한 것이 아님을, 현장 노동자 모두가 똑같은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며 강한 동질감을 갖게 된다.

그동안 혼자 남몰래 삭여왔던 분노를 떠올리며 이제 더 이상 참아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이제 혼자만의 목소리가 아니기에, 자신감을 갖고 동료들과 함께 집단적인 저항에 나선다. 혼자라면 절대 꿈꿀 수 없었던 행동을 하는 자기 모습에 놀라면서 매사에 적극성을 띠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에게 능동적인 삶을 선물해준다. 사실 임금 인상과 고용안정은 이런 노동자들의 집단적 변화의 결과물로 나타나게 된다. 그렇기에 조합원들은 임금 인상과 고용안정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바뀐 자신과 동료들의 모습을 가장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는 것이다.

지난 5월1일, 대학로에서 민주노총이 개최한 제126주년 세계 노동절 집회와 행진에 색다른 퍼포먼스가 등장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들이 빨간 우산을 쓰고 나타난 것이다. 우산에는 “내 삶과 가족을 지키는 최선의 선택, 노동조합”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임금 삭감, 노동조건 후퇴,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저성과자 해고 등 노동개악의 비가 쏟아지고 있다. 비를 피하려면 집 밖을 나가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와 재벌들이 피를 토하며 밀어붙이는 장맛비가 쏟아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은, 동료들과 함께 노동조합이라는 우산을 쓰는 것이다.

이미 조선소에서는 수많은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잘려나가고 있다. 앞으로도 수만명의 하청노동자들과 중소 조선소 노동자들의 고용이 위태롭다는 전망이 나온다. 여소야대로 국회가 바뀌었다고는 하나, 여야 모두가 구조조정 필요성을 합창하는 것을 보면 노동자들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할 상황은 분명히 아니다.

민주노총이 전국 7개 주요 공단 노동자 1291명의 설문을 받아 실태를 분석했다. 그랬더니, 취업규칙 변경을 비롯한 노동조건 악화를 경험했다고 답변한 비율이 23.7%, 법정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비율이 24.5%에 달한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공단 노동자 4명 중 1명이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노동조건이 후퇴했다는 얘기이다. 이게 과연 공단만의 얘기일까?

이제 주저하지 말고 동료들과 함께 빨간 우산(노동조합)을 마련하자. 저항을 의미하는 빨간색의 우산은 앞으로 노동조합 가입 운동의 상징이 되어줄 것이다. 내 삶을 지킬 뿐 아니라 내 삶을 바꾸는 최선의 선택, 노동조합!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605042057015

  [ 이 칼럼은 경향신문에도 게제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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