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의 경주를 멈추라'며 모인 참담한 표정의 기자회견 참석자들 뒤로 '희망 레이스'라 적힌 렛츠런파크의 광고판이 보인다.

국내 최초의 말 마사지사 타이틀을 획득했던 마필관리사 박경근 조합원(전국공공운수노조 부산경남경마공원노조)이 지난 5월 27일 새벽 1시 5분경,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이 일하던 부산시 강서구 렛츠런파크 부산경남(부산경마공원) 마구간에서 세 줄짜리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2011년 11월,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던 마필관리사 박아무개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사례와 별반 다르지 않아 참담함이 크다.

▲ 박경근 조합원이 남김 유서. '○같은 마사회'라 적힌 첫 줄 외에는 해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한국마사회는 비정규직 비율이 매우 높은 공기업이다. 비정규직 비율이 무려 81.9%에 달하지만 마필관리사의 경우 이 통계에 조차 포함되지 않는다. 말을 사육하고 관리하는 업무는 마사회의 주요하고도 상시적인 업무이다. 이렇게 주요하고도 상시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마필관리사는 을(乙)에도 끼지 못하는 간접고용 노동자인 것이다.

이전에는 마사회가 마주를 겸해 조교사, 기수, 마필관리사를 직접 고용했다. 1993년부터 단일마주제에서 개인마주제로 전환하며 마사회와 마주가 분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교사가 마필관리사를 고용하게 되었고 최저임금 수준의 기본급과 성과급을 지급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서울과 제주의 경우 조교사 협회와 마필관리사 협회가 맺은 단체협약에 따라 경마상금을 배분하지만 부산경남은 조교사가 마필관리사를 개별적으로 고용하면서 경마상금도 조교사의 자의대로 배분하게 되어 있다. 상금배분이 투명하지 않을뿐더러 성과급 지급 기준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이다.

박경근 조합원이 속해 있던 전국공공운수노조 부산경남경마공원노조(위원장 양정찬)는 2015년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 조직형태를 변경했다. 이후 사측은 비조합원에게는 성과급을 많이 주고 조합원에게는 적게 주는 형태로 노조활동을 탄압했으며 계약만료를 이유로 노조 위원장을 해고했다. 노조 위원장은 2004년부터 10여년 이상, 근로계약을 반복 갱신해 온 상태이다. 이처럼 끊임없는 노조탄압으로 인해 250여명이었던 조합원이 60여명으로 줄고 노조 활동 또한 위축되었다.

▲ 공정경마로 포장된 죽음의 경주를 멈춰라!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는 참가자들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조는 5월 29일(월) 오전 11시, 한국마사회 부산동구지사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박경근 조합원을 죽음에 이르게 한 마사회를 규탄했다.

▲ 기자회견의 사회를 맡은 이성권 전국공공운수노조 부산본부

사회를 맡은 이성권 전국공공운수노조 부산지역본부 조직국장은 "한국마사회의 산재율은 13.8%로 대한민국 평균 산재율의 26배에 이른다. 박경근 조합원이 겪은 심적 고통과 죽음의 배후는 명백한 한국마사회다"라고 말했다.

양정찬 전국공공운수노조 부산경남경마공원노조 위원장은 경과보고를 통해 "열살난 쌍둥이 두 아들을 두고 떠날 수 밖에 없을 만큼 고통이 심했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돌아가시기 전날 밤, 부인에게 전화해 '조교사로부터 입에 담지도 못할 정도의 폭언을 들었다'고 했다"며 울분을 터트렸다.

박배일 전국공공운수노조 수석부위원장은 "박경근 조합원의 죽음은 한국마사회가 시행한 착취구조에 의한 것이므로 그 책임은 전적으로 한국마사회에게 있다"고 말한 뒤 "가족들과 말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많았던 그가 죽음을 선택할 때는 얼마나 큰 탄압과 고통이 있었겠는가"라며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 양정찬 전국공공운수노조 부산경남경마공원노조 위원장, 박배일 전국공공운수노조 수석부위원장, 김재하 민주노총 부산본부장, 도용회 더불어민주당부산시당 노동위원장, 석병수 전국공공운수노조 부산본부장

김재하 민주노총 부산본부장은 "한국마사회는 연간 수조원의 이윤을 남기는 공기업이다. 막대한 이윤의 실상은 정작 노동자의 착취로 인한 것이라는 게 드러났다"면서 "해괴한 고용구조와 노조탄압은 부정할 수 없는 적폐이며 민주노총은 이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이명박, 박근혜 정권 내내 투쟁했다"고 말했다. 김재하 본부장은 이어 "박경근 조합원은 목숨을 던져 경각심을 주었다. 민주노총 뿐만 아니라 범 시민사회의 연대체인 '적폐청산 · 사회대개혁 부산운동본부'의 이름으로 이 투쟁에 나설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재하 본부장은 "기자들께 부탁드린다. 엊그제 모 방송사에서 박경근 조합원의 죽음을 가정불화로 인한 것이라 보도했다.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제대로 써 주시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석병수 전국공공운수노조 부산본부장은 기자회견문 낭독에 앞서 "한국마사회 최원일 부산경남본부장을 만났었다. 그 자리에서 최본부장은 박경근 조합원의 죽음에 대해 '가정사로 인한 것이 아니다'라고 인정했었다. 그래놓고 가정불화로 인한 것인양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며 분노했다. 석병수 본부장은 "자신이 돌보는 말이 아파서 몇 일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을 돌본 것을 가정사 문제로 치부한다. 또한 사태조사와 재발방지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해놓고 이 사태가 그냥 묻혀지기를 바라고 있다"라고 말했다. 석 본부장은 "박경근 조합원의 명예회복과 문제해결을 위해 공공운수노조는 끝까지 싸울 것이며 그 때까지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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