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들을 상대하던 여성들이 저렴한 주거비를 찾아 정착한 곳이기도

(6)    부평공원의 소녀상과 인천 강제징용 노동자상’

우리 기행단은 점심도 미룬 채 계속 기행을 이어갔다. 다시 고가다리 (남부고가교)로 돌아와 경인선 위 구름다리를 지나니 넓은 공원이 나왔다. 이곳이 1997년까지 군부대가 주둔해 있던 부대 터에 들어선 부평공원이다. 여기에는 소녀상이 있으며, 2017년 올 해에는 ‘인천 강제징용 노동자상’도 세워질 예정이다.

<사진 6. 부평 공원의 소녀상을 살펴보는 기행단>

부평공원에는 일제강점기에는 조병창이 있었고, 이후 미군 부대가 주둔해있었다. 김현석 역사연구사의 설명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미군부대가 주둔지를 반환할 때 반드시 환경오염 평가가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제대로 환경평가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군부대 주둔지 또는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살거나 공원, 학교들이 들어와버려 이러한 곳에서 다이옥신 등 발암물질이 얼마나 나오는지 조사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역사 이야기로 돌아와서) “조병창 공장에 들어오시는 분들은 지원해서 공장에 들어와요. 들어와서 일을 하다가 나중에는 그 상태로 바로 징용되요. 그것을 현원진용라고 부르는데요, (직장에) 한 번 들어오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마음대로 나갈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분들은 그것을 징용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기에 박문여고의 전신인 소화여고가 있었습니다. 거기 다니는 학생들은 12~14살 정도였는데요, 1930년대에는 집집마다 구장들이 돌아다니면서 정신대 입소서를 강요하고, 선생님들은 서류를 내라고 해요. 정신대에 가지 않으려면 군수공장에 취직을 해야 되요. 그래서 학교에 다니던 조선인 학생들은 거의 다 학교를 그만 두고 취직을 합니다. 이 조병창의 경우 빽이라도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던 곳이었어요. 강제노동자상의 모티브가 된 분들 중 한 분도 조병창에서 일을 했는데, 이 분은 징용당했다는 생각을 안했어요. 그 분들은 그나마 여기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남태평양이나 외국 어느 곳 또는 일본에 끌려가지 않았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일제강점기 막바지에는 인력이 딸리니 학생들을 남녀 가리지 않고 데려와 일을 시켜요. 중학생쯤 되는 아이들이 공장에 와서 맹세를 하고 총검을 만들고 그리고 자신들이 만든 무기들을 메고 전쟁터로 끌려나가요. 이렇게 나간 사람들은 징병을 당한 것이죠.

한편, 이렇게 차출되지도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힘이 없는 사람들, 즉, 할아버지나 할머니, 아주머니들 이런 분들은 징용 자체를 안당하죠. (일제 입장에서는) 데려가봐야 도움이 안되니까요. 이 분들은 동네에서 동원되요. 철도 길을 놓거나 산을 깍거나 모내기에 동원되지요. 남자들은 징용되었다고 생각을 하지만, 이들 여자분들은 그런 생각조차 못해요. 일본사람들이 시켜서 하기는 했는데, (그 분들은) 여자가 집에서 항상 하던 일을 동네에서 좀더 했다는 정도로 인식한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징용으로 생각하는 개념과 그 당시 국내에서 노동력 착취당했던 분들의 인식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사할린 등 외국에 징용되었던 분들에게는 국가적 배상 등이 있지만, 국내 경우에 대해서는 국가 차원에서도 징용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라는 활동을 하던 강제동원위원회나 사회운동가들이 있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이런 위원회마저 없어져버리고 지금은 그 논의가 멈춰버린 상태입니다. 그 단체들의 목표는 국내에서 강제동원되어 착취당한 분들을 국가가 인정하고 일정한 보상을 하게 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일제강점기에 그 분들이 부당하게 노동력을 빼앗겼다라는 걸 그 분들에게 자신에게 알려줘야 해요.” 

덧붙여 ‘인천 강제징용 노동자상’의 의미에 대해 김현석 강사가 2017년 2월에 시사인천에 기고한 글을 첨부하면 다음과 같다.

<(중략) ‘현원진용(現員徵用)’ 당한 노동자들은 자의로 회사를 떠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침략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사실상 영원히 공장에 발이 묶여 만들어야 했다. 부평공원에 공장이 있던 미쓰비시가 그런 군수회사다. 미쓰비시 공장의 전신인 히로나카상공 부평공장 건설이 추진되기 시작한 지 80여년이 지난 지금, 부평공원에 ‘인천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세울 예정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대표적 군수공장 터에 강제 동원된 노동자들의 상이 들어선다니, 만일 생존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낄 일이다. 더구나 길 건너 바로 앞은 일본육군조병창 터다. 전국에서 동원된 노동자들의 땀이 스며있는 곳이다.> 

신여성의 삶

“조선시대부터 여성에 대해 죽 이어져오던 생각들이 있습니다. 개화기 때 그 생각이 갑자기 지금의 수준으로 바뀌지는 못합니다. 그나마 여성들이 학교에 다니고 공부를 하는 것을 개화파나 신학교 선교사들이 인정한 것도 자신들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에서의 인정입니다. 예를 들어 체육시간에 팔벌려 뛰기 같은 것을 여자가 어떻게 해라는 의식이 있었던 거지요. 게다가 공부를 한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해 남자들과 취직전선에서 경쟁을 하고 사회 활동을 한다는 것은 더욱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즉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신여성이라는 것이 당시 실상과는 차이가 있는 거죠. 또한, 신여성들 스스로도 고민이 생기는 거에요. 나는 유교적인 학습을 계속 받아왔는 데 신문물을 받아들여 이쪽으로 가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문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고 앞서 나간 분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고 자살을 하거나 다시 (유교 관습으로) 되돌아가는 일을 겪는 분들도 있었지요. 인천의 월미도라는 곳이 일제강점기에 개발이 되는데, 유원지로 예쁘게 개발이 됩니다. 봄, 가을에는 해운대에 놀러 갈 것을 월미도로 갈 수 있었죠, 철도도 있고. 그런 월미도에서 사건 사고가 끊이지를 않아요. 여성들이 절벽에서 떨어져다, 목 매달아 죽었다하는 기사들이 나는데 그 이유가 아직까지 신분제인 사회의식 속에서 자신의 삶이 허용이 안되거나 어떤 노력들이 실패했기 때문이었죠.”

월미도에 대한 짧은 이야기

“월미도는 6.25전쟁 당시 미군들이 네이팜을 집중 투하한 지역 중 하나입니다. 조선시대에 이미 거기에서 살던 사람들은 마을이 통째로 없어지니 섬 밖으로 나옵니다. 밖으로 나왔던 분들은 섬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미군이 주둔해버려서 못돌아갑니다. 이렇게 월미도는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에 이르기 까지 역사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던 공간이며 월미도에 대해 유원지로만 떠올릴 것이 아니라 그런 역사적인 부분들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7) 신촌 클럽 “평양홀”과 기지촌, 병원 부지 

기행단은 당시 신촌 클럽 “평양홀”이었던 건물로 이동했다. 집으로 보이지만, 사진에 보이는 것이 상가 간판을 달았던 구조물이다. 

<사진 7-1. 미군 클럽 ‘평양홀’ 상가 건물>
<사진 7-2. 기지촌 여성 주거 건물>
<사진 7-2. 기지촌 여성 주거 건물>

 

“ (사진에 보이는) 4층 건물은 전일병원이라고 기지촌 여성들이 검사를 받던 병원터입니다. 기지촌 여성들을 검진했던 병원의 기록들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 때부터 동네 토박이로 죽 살아오셨던 분들에게서도 당시 기지촌의 일상 등을 이야기 듣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8) 백운쌍굴

 
“백운쌍굴은 그 시절에 물이 흘렀던 흔적입니다. 저 너머에 광산이 있었고, 그 옆은 한하운시인이 시인으로서 그리고 한센병 환자 활동가로 살아갔던 터입니다. (중략) 60년대 부평을 생각해보자면, 이렇습니다. 부평 한 가운데 미군 부대가 엄청나게 크게 자리잡고 있고, 그 가장자리에는 은광산이 있고, 한센인 마을도 세 개가 있습니다. 나머지에는 공장 (일제가 남기고 간 공장들이 그대로 재활용되었습니다.)들이 쫙 펼쳐져 있고 중간중간에 한국군 부대가 퍼져있고. 좀 희한한 동네이죠. 지금도 군부대만 14개가 있구요. 이런 역사를 거치면서 형성된 부평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어떤 이미지가 있습니다.”

기행 후 한하운 시인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하니, 국립부평나환자센터 및 부평농원,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방송된 청천공단 등의 한센인 정착지에 대한 글들과 한하운 시인의 일생에 대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부평은 이렇게 일제강점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역사적 아픔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기행했던 도로나 건물들을 검색하다 보니 이 지역의 역사 유물, 근현대사 향토사료 등을 모아 전시하고 있는 구립 부평 역사 박물관이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인천 강제징용 노동자 상 건립 사업도 추진되고 있는데, 올 해 안에 부평공원에 터를 잡아 노동자 상이 세워질 수 있도록 우리들의 관심이 많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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