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체 산업 산재는 예고 살인, 감독행정·예방대책 강화해야

지난 6월1일 금속노조,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은(아래 ‘반올림’) 반도체 부품 조립업체인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ATK, 옛 아남반도체)에서 폐암, 유방암에 걸린 노동자들의 집단 산재 신청을 했다.

▲ ATK는 ‘예고된 살인’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산재신청에 필요한 사업주날인을 받기 위해 연락한 회사 담당자는 “일체의 업무상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행태는 최근 사회 흐름을 완전히 역행하는 처사다. ATK지회 노동자들이 2015년 7월13일 성실교섭 촉구와 7.15 총파업 참여를 결의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폐암으로 사망한 한 노동자는 학교를 졸업하고 만19살 나이에 첫 직장인 반도체 사업장에 입사했다. 이 노동자는 폐암 진단을 받고 퇴사하기 전까지 첫 직장에서 30년 동안 일했다.

산재 노동자들이 자신의 청춘을 고스란히 바친 ATK는 삼성전자만큼 아니지만 반도체 조립(패키징)업체로 업계에서 유명하다. 50년 이력에 꾸준히 성장가도를 달리면서 2016년 1조4천4백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임직원은 5천650명이나 된다. ATK는 홈페이지에서 인천 송도에 대규모 신규 사업장을 건립해 100년 기업으로 재도약을 준비하고 있다는 경영진의 야심찬 포부를 자랑하고 있다.

ATK가 승승장구하는 동안 청춘과 목숨까지 바친 노동자들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다. 폐암으로 사망한 노동자 중 한 명은 반도체 조립공정 중 몰드공정에서 설비 유지․보수 업무를 19년 동안 했다. 몰드공정은 반도체 조립공정 중에서 특히 유해한 공정이다. 반도체를 보호하기 위해 반도체 주위를 고온에서 녹인 수지(몰딩컴파운드)로 감싸는 과정에서 벤젠, 포름알데히드 같은 발암물질이 발생한다. 기계 내부는 늘 검은 분진인 카본블랙이 가득하다. 설비 유지․보수 업무는 업무 특성상 기계 내부 유해물질에 직접 노출된다.

동료 노동자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사망노동자의 작업 중 모습은 순백의 방진복을 입은 첨단 반도체산업 노동자가 아니라 검은 분진을 가득 묻힌 연탄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에 가까웠다.

2012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반도체 조립 사업장에 대한 조사를 통해 앞서 언급한 유해물질들이 몰드공정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를 반영해 같은 해 산보연이 발간한 <반도체산업 근로자를 위한 건강관리 길잡이>에 유해물질 노출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들을 명시하고 있다.

“몰드장비의 작동오류 등을 해결하기 위해 장비커버나 장비창문을 열고 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 호흡용 보호구를 착용하도록 해야 함. ……… 벤젠과 포름알데히드 등 유해부산물이 발생하지 않는 몰딩컴파운드․금형세정제로 대체할 필요가 있음.”

그러나 이 노동자는 기체 형태의 유해물질은 물론이고 검은 분진이 새어 들어오는 것조차 차단할 수 없는 얇은 부직포 마스크만 지급받았다. ATK는 심지어 관련 물질안전보건자료(MSDS)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회사가 스스로 밝히지 않는 한 유해 부산물이 발생하지 않는 몰딩컴파운드와 금형세정제 제품으로 대체했는지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연구를 통해 공정의 유해성이 명백히 밝혀진 이후 망인은 그 이전 십 수 년과 똑같이 위험한 일을 해야 했다. 이 위험한 일은 지금 다른 노동자의 몫이다.

유방암 발병으로 이번 집단산재를 신청한 한 노동자는 21년 동안 품질관리부서에서 일했다. 이 과정에서 벤젠, 포름알데히드 등 유해물질과 전리방사선, 야간 교대제 근무 등 유해요인에 노출됐다.

근로복지공단은 지난해 이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품질관리부서에서 근무하다가 유방암으로 사망한 노동자의 산재를 인정하면서, ‘장기간의 야간근로’를 유방암 발병원인으로 인정했다.

ATK에서 ‘장기간의 야간근로’를 수반하는 교대근무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ATK에서 암 발병 피해자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노조가 제보를 통해 파악한 백혈병․폐암․유방암․췌장암 등에 걸려 사망하거나 투병 중인 노동자가 20여명이나 된다. 숨은 사례를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ATK는 ‘예고된 살인’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산재신청에 필요한 사업주날인을 받기 위해 연락한 회사 담당자는 “일체의 업무상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행태는 최근 사회 흐름을 완전히 역행하는 처사다.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는 산재보상과 안전대책 강화 계획을 발표했다. 반올림은 대선 기간 문재인 대통령과 정책협약을 맺었다. 당시 문재인 후보 측은 ▲삼성과 반올림 간 대화 재개 ▲산재 은폐 사업주 처벌 강화책 마련 ▲위험의 외주화 방지 ▲유해화학물질 공개에 관한 투명한 절차 마련을 위해 노력하기로 약속했다.

반도체 사업장 산재를 막기 위해 산재예방을 사후약방문식으로 기업들의 자율에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 산업안전보건법은 고용노동부장관에게 산업재해예방에 관한 중장기계획을 수립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부가 선제로 강력한 예방대책을 마련하고 집행해야 한다. 현행 산안법상 중대재해 요건을 완화하고, 직업병 피해 사례를 반복하는 반도체 사업장의 경우 고용노동부가 강력한 감독행정을 시행해야 한다.

물질안전보건자료(MSDS) 제공 의무를 강화하고 위반 시 강력한 처벌규정을 도입해야 한다. ‘영업비밀’을 이유로 예외를 두는 경우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제도개선이 꼭 필요하다. 일터에서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우리 노동자들이 나서야 한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노동과세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