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31 제주4.3민중항쟁 70주년 정신계승 평화기행단 유적지 체험기

최근 더워지는 날씨에 극장에서 절찬 상영 중일 것만 같은 영화 카피 같지 않은가? 하지만 이 문구는 유채꽃, 벚꽃,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지는 4월 제주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을 짧게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 조합원들과 함께 보고 듣고 느낀 1박2일을 기록한다.

지난 3월 30일 오전9시 제주공항 근처 주차장에서 1박2일 동안 함께할 기행 해설자를 처음 만났다. 제주4.3의 피해자 숫자가 3만 명에 이른다는 참혹한 역사적 사실로 안내를 시작했다. 제주4.3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할까? 제주에는 4,3 당시 학살당한 이들의 이름조차 적히지 않은 백비가 널려있다는 말에 참가자 모두 숙연해졌다.

제주4.3 평화기념관에서 본 백비는 그 모습도 낮설었다. 이름 없이 누운 백비에 내리는 햇빛을 바라보니, 어두운 역사를 밝힐 희망을 상징하는 굴뚝이라고 한다. 인간은 거대한 자연과 조형물 앞에서 알 수 없이 거룩한 기분을 느끼는 것 같다. 이름 없는 백비와 굴뚝은 시끌벅적하던 기행단의 표정에 진지함을 가져다줬다.

제주4.3과 2차 세계대전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해설자. 육지에서의 종전(終戰)도 그랬겠지만, 제주는 말 그대로 전쟁과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한다. 당시 패전을 예상한 일본군은 나중에 상륙한 미군이 최우선으로 무장해제 시킬 만큼 제주에서의 무장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일본으로 갔던 제주 청년들은 조국이 해방되자 건국 준비를 위해 귀향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자연스레 제주 자치를 담당했다. 이후 인민위원회로 발전했는데 제주는 일제의 수탈과 압제에 시달린 가운데도 훌륭한 자치를 해냈다고 한다.

1947년 2월 23일 제주 인민위원회와 대중정치단체 등을 총망라한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 민전의 건국 5칙은 현재와 비교해도 평등민주 원칙에 손색이 없다.

제주에 상륙한 미 점령군은 민중들이 인민위원회를 통해 이미 자치를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친일 경찰·관리를 다시 조선 관리에 중용한다. 조국이 해방되고 다시 나라의 주인으로 살 수 있을 거라는 민중들의 희망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당시 이승만을 내세워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강행하려 한 미국에 민중들은 반대했다. 좌우 진영을 막론하고 민족분단은 반드시 전쟁을 다시 낳고 말 것이라는 당연한 예측이었다. 겨우 되찾은 평화가 깨지는 것을 그 누가 원하겠는가? “통일독립 전취하자!” 절실한 구호를 외친 28주년 3.1절 기념대회에서 군정경찰이 민중들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민심이 들끓기 시작했다. 죽은 이 중에는 15세 학생과 21세 젖먹이를 안은 여성도 있었다. 주민이 시신을 수습하러 가니 아기가 배고파 죽은 어미의 젖을 파고들어 있더라는 이야기에 고개를 숙였다.

경찰발포에 분노한 제주 노동자민중은 총파업으로 항거했다. 한반도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못한 미국은 도리어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라고 규정한다. 해방 후 38선 이북의 사회개혁에 도망치듯 월남한 자본가와 지주로 이뤄진 극우단체 서북청년단은 이승만의 암묵 하에 제주 민중에게 온갖 횡포와 폭력을 휘둘렀다. 군정경찰의 고문치사 은폐를 계기로 폭발한 제주민심은 조악한 무기로나마 무장대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미군정은 조선 지배를 앞두고 단독정부 수립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초토화 작전을 개시한다.

이승만이 지시한 초토화 작전을 통해 미군은 실질적 작전통제권을 행사했다. 군사지도상 제주도에 멋대로 선을 긋고 그 안에 있는 모든 ‘빨갱이’들을 학살하라는 작전. 민족의 자주가 없는 곳엔 민중이 떼 주검이 된다는 말은 제주에서 끔찍하게 실현됐다. 아직까지도 전시 작전통제권을 넘겨받지 못한 우리 정부의 현실을 떠올리면 비참할 따름이다.

불타고 죽임당하는 마을을 떠나 산으로 숨어들어간 민중들을 처참하게 학살한 다랑쉬굴 사건. 글의 서두처럼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섬 제주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친미사대정권의 학살전쟁으로 인해 제주공동체는 황폐화되어 사망자들은 제대로 된 묘비조차 없다. 생존자들은 연좌제와 레드 컴플렉스에 여생 내내 시달렸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떳떳하게 살기 위해 해병대에 자진 입대에 모진 훈련과 차별대우를 이겨내고 반공주의자로 위장해 살아가야만 하는 사회는 얼마나 야만적인가.

지워졌던 역사적 기억이 대를 이어 미체험 세대에게 계승되는 재기억. 그 뜻 깊은 기행에 함께하는 건설산업연맹 노동자들.

4.3위령성지 너븐숭이에 도착한 기행단원들. 북촌리는 제주4.3 당시 단일사건 희생자 수가 가장 많은 마을이다. 학술적으로는 국제법상 대량학살(제노사이드) 금지 위반의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아무 죄 없는 아이들까지 학살한 장소가 제주 민중의 상처로 남은 애기돌무덤 앞에서 기행단원들은 말을 잊었다.

북촌리 학살 애기돌무덤을 지나 도착한 북촌초등학교의 어린이들이 뛰노는 모습에서 제주4.3의 아픈 기억이 겹친다.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행동할 것인가.

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일본군은 결호작전을 감행했다. 홋카이도부터 오키나와까지 결1~6호, 제주에 결7호 진지를 설치한 것이다. 가마오름 평화박물관과 일본군이 강제 징용한 조선인들을 동원해 파내려간 땅굴(지하요새)에서 학살당한 것도 모자라 생존자들은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도 받지 못한 채 노동착취까지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기행단원들은 혀를 찼다. 미 공군을 격추하기 위한 일본군의 대공포진지 멀리 보이는 산방산. 목숨을 바쳐 천황을 지키라는 결호작전으로 인해 오키나와 민중들이 수도 없이 미군에게 학살당했다고 한다. 만약 미군이 제주에 상륙했다면? 왜 우리 민족과 민중은 일본 천황과 미국 전승(戰勝)을 위해 희생당해야 했는가.

기행 1일차의 마지막 프로그램은 제주4.3에 대한 특강이었다. 국가권력에 의한 모든 범죄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말로 강연을 시작한 장창준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상임연구원. 미국은 제주4.3에 대한 진상규명을 받아들이고 책임져야 한다는 강의내용에 기행단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한 일정이었지만 조는 사람도, 딴 짓 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튿날 곤을동 4.3 유적지에 도착하자 탁 트인 바다와 야트막한 산이 상쾌했다. 그러나 이곳은 서북청년단의 “저기 빨갱이가 있다”는 허위신고에 마을 주민 거의 대부분이 학살당한 곳이라는 해설자의 설명에 소풍 같던 분위기도 잦아들었다. 도대체 제주 땅에 민중의 주검이 파묻히지 않은 곳이 어디일까.

일제 강제동원 노동자상 건립 추진위원회에는 민주노총이 함께 했다. 손차양은 탄광이나 땅굴에서 강제노역하다 밖으로 나왔을 때 햇빛에 눈이 부신 모습을, 어깨위에 새는 조국에 대한 향수와 자유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나타낸다고 한다. 노동자상 뒤로 핀 동백꽃의 붉은색이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의 한 맺힌 핏방울 같다.

재작년 박근혜 탄핵촛불 이후 지금은 미투 운동이 사회를 뿌리부터 변화시키고 있다. 광장 민주주의를 경험한 민중은 스스로가 사회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아 젠더권력과 폭력을 배제시키고 있는 것이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제주도민이 됐다고 할 때까지 역사규명과 보상을 멈추지 않겠다”고 말해 제주민중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하지만 왜 미국이 책임지라는 당당한 외교적 주장은 하지 못하는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일본에게 주장하듯 왜 하지 못할까. 제주4.3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질 사람과 국가는 책임져야 한다. 제주도민이 됐다고 말하는 순간은 가만있다고 오지 않는다.

왜 미군정과 이승만은 제주를 학살의 터로 삼았을까? 앞서 말했듯 일본군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해방 직후 인민위원회 자치가 가장 잘 이뤄진 곳이 바로 제주다. 패전군의 무장해제를 핑계로 들어와 남한 단독선거를 강행하기 위한 본보기로 삼으려 했을 테다. 그러나 제주 민중은 숨거나 피하지 않았다. 자치를 무력으로 가로막자 총파업으로 항거했고, 고문하고 죽이자 무장대를 조직했고, 단독선거에는 입산으로 반대했다.

“탄압이면 항쟁이다!” 미국의 침략적 강제 군정과 단독정부 수립을 막아내고자 거리에 나선 제주 민중의 구호. “탄압이면 촛불이다!” 박근혜 탄핵촛불에 경찰이 진압을 하려하자 우리들이 함께 외친 구호. 우리 사회는 얼마만큼 발전했으며 어디로 더 나아가야 하는가. 민족자결과 민중민주주의를 지키려 했다는 이유로 아무 죄 없이 학살당한 제주4.3 영령 앞에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무엇보다 먼저 항쟁의 역사를 기억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일이 중요하겠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노동과세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