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단원고 2학년 5반 박성호 군 누나 박보나 씨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단어 하나를 선택할 때도 한참을 생각했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할까 봐 전화로 인터뷰 얘기를 꺼낼 때 기자의 이름을 말하는 것도 주저됐다. 하루아침에 동생을 잃은 보나 씨를 만나기 전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에 적잖이 당황도 됐다. 기자에게 보나 씨는 유가족의 이야기부터 꺼냈다.

단원고 2학년 5반 박성호 군 누나 박보나 씨. ⓒ 교육희망

"부모님들은 장을 보는 일도 힘들어하셨어요. 자식을 잃고도 먹을거리를 사는 모습을 사람들이 흉보는 것 같았다고 해요."

14일 광화문 광장에서 있었던 플래시몹을 함께하며 피켓을 들어 올리는 보나 씨의 손은 그동안의 힘듦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앙상해진 손에 선명한 부스럼 자국. '면역력이 떨어져서…'라며 말끝을 흐렸지만 보나 씨처럼 지난 4년 동안 유가족 대부분은 몸이 상하고 병을 안고 살고 있다.

봄이면 마음이 더욱 힘들다. 동생과 같은 단원고를 졸업한 보나 씨에게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봄은 남들과 다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단원고 학생들을 만날 때, 희생된 선생님의 이름을 들었을 때, 동생과 비슷한 체격의 사람을 볼 때…. 여름이 오면 동생이 제일 좋아하는 수박을 보며 보나 씨는 또 동생을 떠오를 것이다.

4남매 중 첫째가 보나 씨이고 성호 군은 셋째다. 신학교 진학을 희망했던 성호 군은 사제가 돼 세상과 마주할 꿈을 품었다고 한다. 동생이 가고자 했던 길을 생각하며 보나 씨는 '무엇을 하고 싶고,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었다. 고민은 유가족 형제·자매들과 함께 위안부 할머니, 제주 4.3 유가족, 반올림 황유미 아버님 등을 만나며 조금씩 구체화됐다.

"사건 후 난 어떤 사람이었고 뭘 하고 싶었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어요. 그러다 광우병 촛불집회 때 지나치기만 했던 일이 떠올랐고 그때 조금이라도 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후회를 했죠. 그 후로 뭘 하더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참을 생각하다 망설이며 '어렸을 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들려주는 라디오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는 보나 씨. "선생님들도 청소년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들어주면 좋겠어요. 그 모습을 보며 청소년들도 타인, 약하고 힘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더 듣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세월호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세요"라는 말도 더했다.

그러나 4.16생명안전공원에 봉안당 건립 계획에 인근 주민들은 현수막을 내걸고 반대한다. 세월호 진상 규명을 방해해 온 황전원 위원의 사퇴를 요구하며 유가족은 다시 삭발을 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내년 봄, 보나 씨를 만날 때 조금이라도 웃는 모습으로 마주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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