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현 민주노총 정책연구위원 12/14 정년퇴임식…40년 운동, 인생 제2막 ‘다시 꾸는 꿈’

김태현 민주노총 정책연구위원. ⓒ 노동과세계 변백선

한 길로 걸어왔다. 자그마치 40년이 훌쩍 넘었다. ‘운동’이 전부였다. 학생 때 ‘신념’은 환갑에도 변함이 없었다. 바뀐 것은 ‘세월’이다. ‘긴조’(긴급조치) 세대로 불렸다. 어린 나이에 ‘구속’의 시련을 겼었다.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민주노총 건설의 ‘산파’ 역할을 했다. 이제 정리해야 할 시간만이 남겨졌다. 민주노총은 그에게 어떤 것이었을까.

<노동과세계>가 12월 3일 올해 ‘정년퇴직’을 앞둔 김태현 정책연구위원을 만났다. 민주노총 총연맹 성원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다. 불의에 맞섰던 초롱한 눈에도 노안이 왔다. 안경 너머로 자료를 본다. 75학번 친구들은 그동안 하나둘씩 떠나갔다. 한때 ‘인생을 걸었던’ 동지들이었다. 생계를 위해서, 정치계로, 대학 교수로, 심지어 ‘이념’이 싫어서 ‘운동’을 그만뒀다.

그는 “시원하고 아쉽다”고 정년 소회를 밝혔다. “민주노총 상근 활동가 세대로 보면 1세대들 퇴직을 알리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마감의 시작’인 셈이다. 87년 이후 활동 1세대들의 퇴직이 일정한 성과와 한계 속에 “다시 나아가는 시기”라는 얘기다. 김 위원 개인으로서는 88년 초에 병원노조를 시작해서 딱 30년이 되는 노동운동을 정리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태현 민주노총 정책연구위원. ⓒ 노동과세계 변백선

1975년은 엄혹했다. 누구나 꿈꾸는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입학하자마자 휴교령이 떨어졌다. 학내는 자유롭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학내 시위로 정학처분을 당하고 4학년인 78년 가을에는 구속됐다. 다음 해 12.6 사태가 터지고 석방됐다. 80년 서울의 봄을 겪고, 가을 성수동에서 현장 활동에 뛰어들었다. 노동자들과 현장 활동가들을 만나 미래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어쩌면 민주노총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김 위원은 “‘인생을 걸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엄청난 탄압 속에서 학생운동만으로는 사회민주화가 안 되는 것이었고, 민중운동과 결합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면서 “노동자 계급은 전태일 열사 분신사건 이후 70년대 후반 확산되는 과정이었고 원풍모방, 청계피복 등 민주노조운동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민주노총 출범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1990년 결성된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은 민주노총의 토대가 됐죠. 전국노동자대회 투쟁 과정에서 단일한 대오로 민주노총이 건설됐습니다. 당시 상황은 전노협이 탄압받고 노조 간부들이 구속과 해고로 점철됐어요. 91년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많은 현장 활동가들이 떠나갔습니다. 학자들은 노선을 변경했고 노동운동 위기론이 회자되기도 했죠. 하지만 노동법 개정 투쟁으로 한국노총에 대비될만한 조직 성장을 이뤘고 결국 총연합 단체로 결성(1995년)됐던 것입니다.”

김태현 민주노총 정책연구위원. ⓒ 노동과세계 변백선

96~97년 총파업은 그가 꼽는 ‘지상 최대의 전투’였다. “자연발생적인 각성과 노조결성으로 이어진 87년 대중항쟁이 있었고, 이후에도 여러 투쟁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정권탄압에 맞선 경제적 투쟁이 중심이었죠. 하지만 96~97년 총파업은 달랐어요. 민주노총 출범을 통해서 목적의식적으로 노동법 개정이라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요구를 내걸고 전국의 노동자들이 지도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고 정권 자체도 굴복시켰습니다. 민주노총에 대한 사회적 지지도 어마어마하게 올라갔죠. 날치기 통과됐던 노동법, 안기부법이 투쟁으로 무효화됐고 재개정됐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없었던 대사건이었습니다. 모범적인 신자유주의 투쟁으로 각인된 역사 그 자체였던 거죠.”

그래도 40년 ‘운동’을 해왔는데 그의 철학은 무엇일까. 그는 대뜸 “옛날 얘기하면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꼰대소리’로 여길 것 같아 조심스럽다”고 말을 꺼냈다. “운동이라는 것은 그 시대의 과제에 대해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운동 조직이 필요한 거고요. 민주노총을 대변하는 운동 1세대가 담았던 과제가 외환위기 이후에는 새로운 조건과 상황으로 바뀌었습니다. 노동운동이 맨날 망하니 어쩌니 하지만 새로운 조건 속에서 새롭게 억압받는 많은 노동자들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과정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없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에요.”

그는 민주노총에 대해 지금 가장 큰 과제가 ‘핵심 고리’를 찾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시대에 맞는 핵심 화두가 없다는 얘기였다. “온갖 좋은 얘기들은 엄청 많이 하는데 자기 실력에서 풀어낼 수 있고 운동의 발전을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풀어낼 과제가 뭔지 합의를 이끌어낼 만한 지도력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태현 민주노총 정책연구위원. ⓒ 노동과세계 변백선

최근 민주노총이 겪고 있는 ‘사회적 대화’에 대한 얘기도 조심스럽게 꺼냈다. “오랫동안 경험을 통해 보면 사회적 대화든 총파업이든 둘 어디에도 별로 활로를 찾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상당수 노조들은 안정돼 있고 자신들의 위치에 많이 안주하고 있는 형편이죠. 사회적 대화라는 것도 우리만이 있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개혁적인 정부라도 정권의 속성은 있기 마련이죠. 사용자와도 근본적인 입장 차이가 있고요. 우리 자체의 역량에 따라서 필요한 만큼의 사회적 대화를 하는 것뿐이지 돌파구는 될 수 없다고 봐요. 현실적으로 집중해야 하는 것은 열악한 비정규직, 미조직 영세노동자를 조직화하고 그들의 관점에서 투쟁과 교섭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는 민주노총 활동으로 얻은 ‘자산’에 대해 “맷집이 커졌다”고 했다. 대중 조직운동이라는 단련과정이 그를 여기까지 끌어온 셈이다. 희비에 현혹됨이 없이 운동을 떠나지 않고 버티면서 활동하게 한 ‘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아쉬움도 자리한다. 그는 오랜 시간을 정책연구 사업에 몰두했다. “정책연구원이 민주노총 ‘싱크탱크’ 역할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못 닦은 게 아쉽죠. 그동안 많은 집행부들이 교체됐지만 지원이 부족했습니다. 장기적인 것보다는 결국 당면 투쟁에 집중했어요. 인력과 예산이 따라주지 못했고, 결국 실질적인 싱크탱크로 자리매김 하는 데로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민주노총 ‘정년’을 처음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 묘하게도 지금 그가 대상자 1호가 됐다. 민주노총 설립 때 기획국장으로 일했고, 그때 총연맹 규정을 처음 만들었다. 당시 토론 끝에 60세 ‘정년’에 대한 조항을 넣었다. 그런데 단병호 위원장 시절 이규재 부위원장이 60세가 넘었다. 상근을 하게 됐는데 호봉표가 없어 임원에 한해 60세 규정을 없애기로 했다. 그런데 당시 총국성원들이 차별 문제제기를 해서 전체에 대해 정년을 없앴다는 것이다. 이후 정년 규정은 작년에 산입 개정됐다.

김태현 민주노총 정책연구위원. ⓒ 노동과세계 변백선

그는 이제 인생 제2막인 ‘노후’를 꿈꾼다. “퇴직하면 우선 덜먹고 덜 써야 한다”면서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도의 역할을 하고 싶다”고 털어놨다. “청소년 인권교육이 됐든, 노동운동의 역사를 들려주는 가이드가 됐든, 가장 열악한 이주노동자 지원활동이 됐든, 아시아 노조활동가 교육이 됐든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연구 활동도 계속 할 겁니다.”

그는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다. “이제 퇴직해서 아내의 행복을 위해 해외여행을 가려 했는데, 아내가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그러지도 못한다”고 못내 아쉬워했다. 아내도 같은 길을 걸어 온 활동가 출신이다. 현장에서 노조활동하다 해고돼 성수동에서 처음 만났다. 1988년 3월에 결혼, 아이를 낳고 출판사에서 일을 했다. “당시 가장으로서 수입이 따로 없었어요. 10~20만원 활동비가 고작이었습니다. 업종 친구들은 월급이라도 있었지만 전노협은 해산때까지 월급이 없었죠.” 그에게는 아들(30), 딸(25)이 있다.

그는 최근 ‘암벽’을 타왔다. 건강을 위해서다. “바위에 올라서서 보는 경치는 모든 힘든 과정을 보상해준다”고 했다. 어쩌면 민주노총도 난공불락 ‘큰 바위’였을지 모른다. “운동해 오면서 봐 왔던 모든 경험들이 보상”이라고 했다. “한 길만 가다보니 옆의 것을 살피지 못하는 문제도 생겼다”고 고백했다. 운동에 대한 신념과 고집으로 달려온 그는 이제 14일 오후 4시 ‘정년퇴임식’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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