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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인천 여성노동기행을 마치고
  • 박찬미(전국공무원노동조합)
  • 승인 2019.07.08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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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천에서 10살부터 40년 정도를 살았다. 나의 부모님이 인천에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삼능(三菱). 방하나 부엌하나가 전부인 쪽방이 줄지어 있었던 셋방의 맨 끝 방이 우리 집이었다. 우리 옆방으로는 항상 진한 화장을 하고서 미군부대에서 미제 물건을 받아다 팔던, 중년의 아주머니가 살았다.

작년에 민주노총에 진행한 인천여성평화기행을 하기 전에는 내 어린 시절이 우리의 근현대역사가 지나간 아프고 애달픈 자리 위에 있었다는 걸 몰랐다. 기행을 하면서 내가 살던 그 셋방이 아마도 미쯔비시 줄사택 중 하나였겠구나라는 생각과 미제 물건을 팔던 그 아주머니는 혹시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다가 나이 들어 쪽방 한켠에서 미제 물건을 팔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분은 아니었을까하는 추측을 해보기도 했다.

올해 민주노총은 개항기부터 근현대까지 인천에서 있었던 여성노동자들의 노동과 투쟁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다.

인천의 근대 역사는 제물포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부산과 원산이 그렇듯이 인천 역시 일제의 조선수탈을 위한 교두보로써 일본의 필요에 의해 개항된 곳이다. 개항 후 인천은 조선의 값싼 노동력과 일본기업 보호정책 아래 일본의 자본이 본격적으로 진출한 곳 중 하나이다. 일본인이 세운 “정미소”를 시작으로 성냥, 비누, 양조 공장 등이 생겼다. 인천에 있는 공장과 항구에 일자리를 구하러 전국 각지의 조선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래서인지 인천은 토박이보다 외지인들이 많고 지금도 전국 각지의 향우회가 참 많다.

이곳 인천에서 조선 여성들은 민족차별과 성차별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혹사당했다.

우리 기행의 첫 장소는 조선성냥공장 자리에 새워진 배다리성냥박물관.

(성냥! 등잔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엌 석유곤로 옆에는 항상 성냥이 있었던 기억이 있다. 한때는 생필품이었던 성냥. 그런데도 난 성냥공장을 본적도 성냥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알지 못했다.)

식민자본으로 설립된 조선성냥공장은 노동자의 대부분이 가난했던 어린 소녀들이였다. 이미 시간 속으로 소멸해버린 조선성냥공장 터에 새롭게 지어져 올해 문을 연 성냥박물관은 켜켜이 쌓인 시간위에 너무나 이질적으로 서있던 새 건물. 우리가 이 성냥공장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인천 최초의 파업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성냥공장의 여성노동자들은 1921년 3월 10일에 임금문제로 처음 동맹파업을 했고, 이는 이후 발생하는 인천정미소 여성노동자의 동맹파업과 부두노동자의 파업을 선도하는 발화점이 되었다.

일제식민지하에서 파업을 결행할 정도로 당찼던 “성냥공장아가씨”들의 투쟁기를 뒤로하고 이동한 곳은 정미소들이 밀집해 있던 지역이었다. 개항 후 인천은 일본 조선수탈의 통로가 되었는데, 특히 조선의 쌀은 주요 수탈품목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인천은 전국 최대의 미곡집산지가 되었고 정미소가 많이 세워 졌다. 정미소에서 쌀에 섞인 이물질을 골라내는 작업을 ‘선미’라고 하는데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의 여성노동자들 역시 값싼 임금과 민족차별, 일본인 관리자에 의한 폭력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에 저항하는 정미소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13개 정미공장 여성노동자 3천여명이 ‘선미여성조합’을 조직하여 1926년 3월에 9개 정미소 노동자 5천명의 동맹파업이 있었다. 이들은 임금인상, 구타방지, 부당해고금지, 8시간 노동, 잔업수당 지급, 여성차별금지 등을 요구했고 공장주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이 지금의 우리들이 쟁취하고자 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놀라웠다.

1920년대의 그들이 너무나 진보적 이였던 걸까? 아니면 100년이 지나도록 노동자의 현실은 변한 것 없이 제자리인 걸까? 많던 정미소들이 있던 자리는 대형마트와 아파트로 바뀌었고, 빛바랜 유물처럼 한켠에 남아있는 붉은 벽돌 건물 몇 동이 정미소를 기억하는 역사의 증인처럼 남아있다. 정미소 여성노동자들의 격렬했던 투쟁의 역사가 history 사이로 모래처럼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기억하기 위해서 그 날 우리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 서있었다.

점심식사후 차량을 이용해 일제감점기에서 한국전쟁 이후의 시간으로 이동했다.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 어느 교육에서든 어느 강의에서든 반드시 배우게 되는 역사적 투쟁의 한 페이지, 여성노동자 투쟁의 역사적 현장 ‘동일방직’ 그 앞에 섰다. 나체시위, 똥물투척 사건으로 더 잘 알려진 동일방직 여성노동자의 투쟁은, 사측이 노조 어용화를 위해 매수한 남성노동자들을 앞세워 여성주도적 노동운동을 폭력적으로 탄압했다. 이에 맞서 저항하던 여성노동자들의 함성이 현재는 비어있는 동일방직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투쟁사이니 긴 설명은 생략하자.

생각보다 굉장히 넓었던 동일방직 담장을 돌아내려오니 조그만 소공원이 나온다. 만석어린이공원이다. 뜨거운 태양과 동일방직 투쟁사로 몸도 맘도 뜨거워진 우리는 공원 나무 그늘 밑 벤치에 모여 앉아 1980년대 빈민여성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인천의 빈민여성운동은 한국전쟁이후 최초의 진보적 여성단체였던 ‘여성평우회’에서 만석동에 ‘큰물 공부방’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무허가 판자촌이 빼곡히 들어서 있던 만석동은 인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 중 하나였다. 남성, 여성할 것 없이 생계에 매달려야만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들, 기혼 여성들마저도 아이들을 방치한 채 일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아이들을 보듬어 준 공간이 ‘큰물 공부방’이었다. 평우회 활동가는 자신의 주거지까지 만석동으로 옮기며 헌신하여, 아이들 뿐만아니라 지역주민들을 위한 여러 사업으로 지역여성들의 마음까지 얻고 공부방에 대한 지역주민의 인식도 바꾸어 놓게 된다. 지역주민과 함께 더 나은 삶을 꿈꾸던 만석동 역시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역사적 뒤안길로 사라지고 공부방이 있던 자리만이 작은 공원으로 남아서 우리에게 잠시 쉬어 갈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잠시 쉰 우리들은 부평공단으로 이동했다. 부평공단은 여성노동자의 수가 남성노동자보다 월등히 많았고, 70~80년대 여성에 의한 민주노조운동이 활발히 일어난 곳이다. 회사에 매수된 남성노동자 위주의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만들기 위해 여성지부장을 선출하고 생리휴가 쟁취, 결혼 후 퇴사관행에 대한 변화시도, 관리자들이 여성노동자를 인격적으로 대우할 것 등에 대한 요구들을 관철시켜 나갔다. 부평공단을 마지막으로 여성노동자 스스로가 민주노조의 주체가 되어 노동자의 권리는 물론 여성의 권리까지 획득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를 찾아 나선 우리의 여정을 무사히 마쳤다.

이 기행을 마치면서 우리가 왜 여성노동자의 역사를 찾는 기행을 기획했는지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는 history속에 가려져 있던 herstory를 찾고 싶었다. 기억하고 싶었다. 기록하고 싶었다. 유리에 은을 칠해 만드는 거울 뒤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현재의 내 모습밖에는 비춰주지 못하지만 역사로 만들어진 거울의 뒤에는 층층이 쌓인 시간들이 있다. 이 거울은 과거를 통해 현재의 우리 모습과 미래로 뻗어 있는 길을 보여준다. 이번 기행은 여성노동자 역사의 거울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역시 기억되고 기록되는 여성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박찬미(전국공무원노동조합)  kct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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