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50주기 기념 사진전 인터뷰]
방송작가, 원진주
2020년 전태일 열사 항거 50주기를 맞았다.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를 외치고 산화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한 것은 노동자의 권리였다.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 고발이었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열악한,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지키고자 했다.
민주노총은 여전히 불평등 속에서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조명하고자 한다.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는 오는 11월, 지금의 여성노동자들을 만나 그들의 현재를 사진전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지금, 우리는’. 사진전에 앞서 민주노총이 만난 여성노동자들을 〈노동과세계〉에서 소개한다. [편집자주]
"방송작가도 노동자 입니다"
방송작가, 원진주
12년째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현재 KBS2tv에서 방송되고 있는 <아침이 좋다>를 제작하고 있어요.
고등학교 때 글쓰기와 방송을 좋아하는 저를 바라보면서 방송작가에 대한 꿈을 갖게 됐어요. 대학에 진학해 문예창작과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졸업하기 전부터 이 일을 시작했죠. 부모님께서는 공무원, 선생님 같은 안정적인 직장을 원하셨지만 저랑 맞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요. 현재 이 직업이 제 첫 직장이에요.
방송작가들은 방송 제작에 있어 전반적인 업무를 맡아 하고 있어요. 기본적인 자료조사부터 인물(연예인 및 일반인 사례자 등) 섭외, 장소 섭외, 촬영구성안, 편집구성안, 대본, 자막 등의 업무를 하고요. 프로그램에 따라 현장 답사, 촬영 동행도 합니다. 하나의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데 손이 안가는 게 없죠.
현재 화요일 아침 방송을 하다 보니 월요일에 늘 밤샘을 해요. 아침 10시 30분 정도에 출근해서 편집된 영상을 피디들과 함께 보고, 수정할 부분들을 체크하고, 수정된 영상이 완성될 동안 다음 주 아이템을 찾아요. 영상이 수정되면 본사(KBS)에 들어가 검수를 받고 영상이 나오면 대본과 자막을 쓰죠. 그러는 사이 다음날 새벽이 됩니다. 완성된 대본을 갖고 생방송을 진행하고요. 1시간 10분여간의 방송이 끝나고 9시경 퇴근을 합니다. 화요일은 방송을 털어냈으니 암묵적으로 휴일이지만 또 다음 촬영 준비해야 하기에 한숨자고 일어나 또 다시 일을 시작하죠. 아이템을 찾거나 섭외를 시작하고, 촬영 구성안을 쓰고, 금요일 또는 토요일에는 피디를 현장에 촬영 보내는 스케줄이에요. 이렇게 일주일이 반복됩니다.
이 일을 하는데 있어서 방송작가가 일일이 챙기지 않아도 되는 자잘한 업무가 내려오기도 해요. 김밥, 도시락 챙기기, 정산 업무 등 작가 업무가 아닌 잡일들에 대한 업무가 수반되고 있어요. 이렇게 일을 시키면 안 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업무들이 내려오다 보니 이런 것들로 인해 저희들은 내부에서 ‘작가’가 아닌 ‘잡가’라는 표현을 쓰기도 해요. 안좋은거죠.
12년째 일을 하고 있지만 너무너무 열악하고 힘들긴 해요. 하지만 저는 아직 이 일이 좋습니다. 저는 ‘좋아야만 할 수 있는 게 방송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방송작가를 좋아서 시작한 후배들이 평생직장으로 가질 수 있도록 불합리한 관행이나 처우 개선을 위해 “방송작가도 노동자”라고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는 ‘프리랜서’라 일컬어지는 방송 비정규직들이 있어요. 그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는 게 방송작가입니다. 대부분의 방송사에서는 ‘프리랜서 작가’를 고용함에도 상근을 요구하며 저희를 회사에 묶어두려고 하고 있어요. 남들은 방송작가를 프리랜서라고 부르지만 저희는 전혀 프리하지 않아요. 주 52시간 넘게 일하는 건 기본이고, 쪽잠을 자며 대본을 쓰고, 또 근로계약서를 쓰기는커녕 프리랜서라는 명분을 내세워 소모품 내버리듯 부당해고를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죠. 방송계의 가장 큰 문제점이에요.
저도 지난해 한 방송사와 제작사로부터 부당한 해고를 당했어요. 10년 넘게 일하면서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경험한 건 처음이었어요. 그때 충격으로 방송작가라는 이 일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으니까요. 해고 이유는 ‘시청률이 안 나온다’ 였어요. 시청률 저조의 책임을 작가에게 돌린거죠. 방송하시는 분들은 다 아실거에요. 시청률이 높고 낮은 것의 문제는 결코 작가의 탓이 될 수 없어요. 이 가운데 제작사는 새로운 작가팀을 꾸리고 있었죠. 한 달가량 노동조합으로 뭉쳐 함께 맞서 싸운 결과 사과문을 받았어요.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가 최초로 공식 사과문을 이끌어 낸 선례가 됐지만 사실 이 사과문은 방송사가 제작사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주장 탓에 아쉬움이 많았죠.
사실 많은 작가들이 부당함을 겪으며 일을 하면서도 그 상황이 부당한지 잘 몰라요. 저 역시도 신입과 서브를 거쳐 오면서 그랬어요. 말도 안 되는 처우와 현실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방송작가를 프리랜서라고 규정한 사회에서 내가 노동자인줄도 모르고 일을 했던 거예요. 그 누구도 이게 부당하다는 걸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방송작가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방송작가도 노동자다”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을 보고 나도 노동자라는 생각을 했고, 이렇게 함께 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남성작가의 비중이 많이 증가했어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여성의 비율이 훨씬 높아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결혼이나 육아를 하면서도 경력 단절 없이 계속하기 좋은 직업이라는 기대 때문이 아닐까 해요. 그렇지만 일하는 환경이 생각했던 것만큼 배려되지 못해요. 만연한 문제로 성희롱이나 성차별 문제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지만 고용 불안 때문에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죠. 또, 법에 의해 당연히 보호받아야 할 임신, 출산, 육아 문제 등 모성보호도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받지 못하고 있고요.
학교에 강의를 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한 학생이 야심차게 질문을 해오는데 질문이 “방송작가를 하려면 예뻐야 하나요?” 라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너무 당황해서 그 질문이 나오게 된 경로에 대해서 되물었죠. 그 학생 주위에 남자 PD가 있었는데, '얼굴이 예뻐야 방송작가가 될 수 있다'고 했대요.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만약 작가가 남성 비율이 많은 직업군이었어도 그 PD는 그런 말을 했을까요.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폭력을 당하는 것이 아닌 인권이 존중받는 세상을 위해 제도적 부분들이 한 시라도 빨리 개선되어야 해요.
지속적으로 방송작가 노동조합에서 방송작가들은 ‘위장된 프리랜서’라며 법제도 개선을 촉구하고 있지만 그 무엇 하나 바뀌고 있지 않는 실정이 개탄스럽기만 합니다. 50년 전 전태일 열사가 바꾸려고 했던 노동 현실, 허나 지금 대한민국 노동의 현실은 50년 전과 다르지 않아요. 지금이라도 노동자가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세상, 꿈을 꿀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비록 전태일 열사처럼 몸을 내던질 순 없더라도 약자를 위한, 방송작가들을 위한 움직임과 목소리가 사회에 울려 퍼질 수 있도록 나 스스로가 죽을 각오로 최선을 다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인터뷰 변백선 / 사진 이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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