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행동 당사 전단지를 배포하는 야마카와 슈헤이(2010년). ⓒ 야마카와 슈헤이 제공
금요행동 당사 전단지를 배포하는 야마카와 슈헤이(2010년). ⓒ 야마카와 슈헤이 제공

김중곤의 소개로 나고야 지원회에 입회

1936년생, 만 83세. 일본에서는 인생 말년의 고령자. 기력이 쇠약해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역으로 집필 의욕은 왕성하다. 작가의 의지라고 할까. 숙명처럼 느껴진다. 이 의욕이야말로 생명력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세 차례의 큰 병을 극복하고 연명하게 된 것도 그런 의지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처음으로 조선에 관심을 갖은 사건은 태어나기 전인 1923년 9월에 발생한 관동대지진이었다. 관동대지진 때 약 6000여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과 안중근의 사상에 매료된 치바 도시치(千葉十七). 그들의 생애에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3.1독립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더구나 중학교 2학년 때 발발한 한국전쟁. 이러한 사건들이 나중에 내가 한국으로 홀로여행을 계속하게 된 요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졸저 ‘한국낭만방황’에 상세히 기술했다.

‘인간의 보루’의 주인공 김중곤과의 만남은 이와 같은 사건들 연장선상의 우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만남으로 ‘조선여자근로정신대’를 접하게 되었다. 또한 김중곤이 한국전쟁을 체험한 것에 대해서도 매우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한국을 여행할 때마다 당시 제주도에 거주하던 김중곤의 자택을 방문했다. 그리고 김중곤 부부와 만났다.

나고야 지원회에 대한 얘기를 김중곤에게 들은 것은 교류한 지 6개월 후였다. 김중곤의 소개로 나고야 지원회의 공동대표 다카하시 마코토(高橋信)와 만난 뒤 나고야 지원회에 가입했다.

목숨을 걸고 금요행동에 나서

일찍이 다카하시 마코토를 중심으로 ‘아이치현 조선인 강제연행조사반’이 결성돼 멤버들은 자주 한국으로 건너가 조사를 했다. 다카하시 마코토가 이 문제에 착수하게 된 경위 등은 ‘인간의 보루’에 상세히 기술했다.

조사를 개시한 지 18년 후 이윽고 나고야지방재판소에 사죄와 배상을 추구하며 제소하게 되었다. 소송 대리인이자 변호단장 우치카와 요시카즈(内河恵一) 변호사 외 50여명의 변호사, 그리고 나고야 지원회의 회원들이 후원한 역사적 소송이었다. 약 5년간에 걸친 구두변론을 통해 결심에 이르렀다. 2005년 2월 24일 판결이 내려졌다.

‘한일협정에 의한 해결완료’라는 단 한마디로 원고의 청구는 기각되었다. 원고가 나고야고등재판소에 항소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항소심 판결은 그로부터 2년 후인 2007년 5월 31일. 1심에 이어서 2심도 한일청구권협정을 이유로 기각되었다. 당시의 상황과 판결에 대해서도 ‘인간의 보루’에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원고가 최고재판소에 상고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금요행동은 상고와 함께 시작한 어필 행위. 미쓰비시그룹 핵심멤버들의 회의가 개최되는 금요일에 맞춰 매주 금요일 아침부터 금요행동을 실시하게 되었다. 최고재판소 판결까지 지속하는 것이 목표였다. 장소는 미쓰비시중공업 본사가 위치한 도쿄 시나가와(品川)역의 남쪽 출입구였다. 이 남쪽 출입구는 아침에 셀러리맨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노도처럼 휩쓸리며 지나가는 장소.

금요행동에 빠지지 않은 참가자는 나고야 지원회의 공동대표 중 한사람인 데라오 데루미(寺尾光身=나고야공업대 명예교수)와 필자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매주 교대로 나고야에서 두 명이 상경해 참가했다. 이 네 사람 외에 그 날의 사정에 따라 2~3명이 합류하기도 했다.

나는 아침 6시 반에 자택을 나와 8시~10시에 남쪽 출입구에서 어필 행위를 실시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뒤 미쓰비시중공업 본사의 현관 앞으로 가서 12시까지 어필 행위를 이어갔다. 통행인에게 건네줄 전단지는 매주 나고야에서 올라오는 멤버가 지참했다. 횡단막과 스피커, 사진패널 등은 필자가 자택에 보관했다가 매주 지참했다.

그로부터 약 3년 반 동안 145회의 금요행동을 실시했다. 나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참가했다. 금요행동을 병행하며 ‘인간의 보루’의 집필에 매진했다. 이 책의 중심테마는 ‘김중곤과의 인관관계, 한일관계의 역사, 그리고 전후배상은 무엇일까’라는 세 가지 내용. 약 2년에 걸쳐 완성했다. 출간 후 최고재판소 판사 6명을 비롯해 미쓰비시중공업, 후생노동성, 국회의원 등에게 증정했다. 일반서점에서도 판매를 시작했다. 많은 매체가 기사화했으며 서평을 통해 거론해 주었다.

금요행동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일본인이 대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고한다. 분발해!”라며 성원을 보내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심장 바이패스 수술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내가 아침 일찍 금요행동에 나서는 것은 솔직히 목숨을 거는 행위였다. 하지만 나의 결단은 확고한 상태였다. 언제 쓰러지더라도 상관없다는 각오로 다져져 있었다. 미쓰비시 사장에게 쓴 편지와 심장병 특효약(니토로글리세린)을 윗도리 안쪽 포켓에 넣고 활동을 계속했다. 그렇게 약 3년 반 동안의 1차 금요행동을 145회 실시했다. 하지만 최고재판소는 1심, 2심에 이어서 “한일협정에 의한 해결완료”라며 기각시켰다.

한글판 ‘인간의 보루’를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길 바란다.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애쓴 김정훈 교수(전남과학대)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안타깝게도 한글판 출간을 유일한 낙으로 삼던 김중곤 씨가 작년 1월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2011년 10만 희망릴레이에 참가한 김중곤. 바로 옆이 양금덕 할머니. ⓒ 야마카와 슈헤이 제공
2011년 10만 희망릴레이에 참가한 김중곤. 바로 옆이 양금덕 할머니. ⓒ 야마카와 슈헤이 제공

※ 작가 소개
야마카와 슈헤이(山川修平)

본명은 치바 가츠야(千葉勝也). 1936년 이와테(岩手)현 이치노세키(一関)시 가와사키초(川崎町)에서 태어났다. 10대 후반 폐결핵으로 오랫동안 요양생활을 했다. 이 때문에 뒤늦게 21세에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며 고교시절부터 동인지를 펴냈다.

이치노세키 제일고등학교, 와세다대학 심리학과 졸업 후 한때 출판사에 근무했으나 여의치 않아 독립한 후 전문지 『저자와 편집자』를 발간했다. 하지만 출판업에도 좌절 후에는 주택산업계로 전신해 하우스 메이커에 근무하면서 창작활동을 펼쳤다.

『와세다문학』 『북(北)의 문학』 등, 동인지에 소설을 발표했다. 정년퇴직 후 문필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이웃나라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기에 문필활동을 통해 한일관계의 정립에 헌신하고 싶은 생각에 변함이 없다.

저서에 『야마카와 슈헤이 작품집─죽음의 주변』(小說社), 『백자의 화가』(三一書房), 『소설 북상천(北上川)』(三一書房), 『무뢰파낭만방황』(三一書房), 『한국낭만방황』(三一書房)이 있다.

덧붙이는 말 : 이 글은 ‘대학지성 In&Out’에 실린 내용에 기고문의 형태로 가필을 했고 사진도 보충하였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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