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청년을 만나다 ④ 대학노조 성공회대지부 김미라

올해 서른여섯 살 김미라 씨는 성공회대 학생복지처에서 장학금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2009년부터 모교인 성공회대에서 비정규직 조교로 일했고, ‘계약 만료’를 이유로 2년마다 노동자를 자르는 학교에 맞서 싸웠다. 1년간의 복직 투쟁 끝에 무기계약직으로 학교에 돌아왔고, 오랜 싸움 끝에 지금은 정규직과 같은 노동조건에서, 같은 임금을 받고 있다.
“노조가 어떠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고 싶다는 미라씨를 <노동과세계>가 만났다.

김미라 대학노조 성공회대학지부 조합원. ⓒ 송승현 기자
김미라 대학노조 성공회대학지부 조합원. ⓒ 송승현 기자

비정규직으로 시작한 대학 조교, 계약 만료에 맞선 복직 투쟁

미라씨는 지금 직장이 된 성공회대의 학생이었다. 성공회대는 소위 ‘진보적인 대학’이라고 알려진 곳이다. 故신영복,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등이 교수로 적을 둔 대학이기도 하다. 미라씨는 그런 상황을 잘 알지 못하고 점수에 맞춰 입학했다. 과에는 대안학교를 나온 친구들도 있었고, 그런 만큼 다른 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많아 신기했다. 여성을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것도 선배들이 먼저 알려줬고, 과 학생회 활동을 하며 친구들과 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미라씨에게 대학 생활은 좋은 기억이다.

“학교 다니면서 제일 좋았던 게, 남녀 가리지 않고 같이 흡연할 수 있던 분위기였어요. 학교 들어오다 보면 큰 느티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이 다 거기서 만나고 모이고 그랬어요. 그 자리가 지금은 금연인데, 저 학교 다닐 때는 다들 거기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요. 남녀, 선후배 상관없이 다 같이 흡연하는 곳이었어요. 사회에서는 여자들이 숨어서 담배 피우고 그러잖아요. 제가 흡연자는 아닌데, 여자들이 거리낌 없이 같이 담배 피울 수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고 좋았어요.”

대학 졸업 후 2009년, 미라씨는 학교에 비정규직 조교로 들어왔다. 일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대학노조 성공회대지부에서 비정규직 고용문제에 함께 대응해보자고 손을 내밀었다. 나서기는 쉽지 않았다. 미라씨도 그렇고 대부분 모교 출신이었는데, 학교에서 뭔가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뻔히 아는 동기, 선후배, 교수들이 있는 공간에서, 비정규직인 것을 알고 시작한 일에 뭐라 하는 것이 토를 다는 일 같기도 했다. 그러던 중 6명의 동료가 계약 만료를 이유로 해고됐다. 2011년, 해고되고 나서야 전원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싸움을 시작했다.

“학교에서 우리가 나간 자리를 정규직으로 대체했어요. 정규직이 하는 일이고, 학교에 계속 필요한 일이었던 거죠. 우리는 이미 2년이나 일을 했고 전문성도 쌓였는데, 왜 우리를 고용 승계하지 않느냐고 투쟁을 시작했어요. 그때 저는 노동조합이 뭔지, 투쟁이 뭔지 몰랐어요. 학교에서 선전전을 시작하는데, 한 학생이 ‘해고는 살인이다’ 피켓을 만들어왔어요. ‘해고’, ‘살인’, 이런 단어들이 되게 무겁잖아요. 그걸 들고 있다가 깨달았죠. ‘계약 만료’라는 포장지에 싸여있지만 나는 계약‘해고’된 게 맞다고요.”

ⓒ 김미라 제공
ⓒ 김미라 제공

진보적인 대학? 투쟁으로 쟁취한 복직과 다시 또 투쟁

소위 진보적인 대학이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을 보장하라는 최소한의 요구에 학교는 묵묵부답이었다. 함께하는 학생들이 있어 힘이 났지만, 모두가 지지해준 것은 아니다.

“수업시간에 ‘저 사람들 계속 일 시키려면 등록금 올려야 하는데 괜찮아?’ 말하는 교수도 있었어요. 학교에 대외적으로 진보적인 교수라고 알려진 분들도 많았는데, 저희가 투쟁하는 동안 공개적인 입장을 낸 교수님이 거의 없었어요. 학생들이 교수님 수업시간에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묻는 일까지 있었어요. 전임 교수 중에는 싸움 끝날 때까지 투쟁을 지지해준 분이 딱 한 분이었죠. 그때는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무언가를 말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싶기도 해요. 그렇지만 그만큼 소중한 일인 거고요.”

복직 투쟁은 1년간 이어졌다. 쉽지 않은 싸움이었지만 학교 학생들, 민주노총 서울본부 남부지구협의회 등 연대하는 이들이 있어 끝까지 버틸 수 있었다. 2012년, 계약 만료를 앞두고 싸웠던 동료 1명과 미라씨는 무기계약직으로 학교에 복직했다.

김미라 대학노조 성공회대학지부 조합원. ⓒ 송승현 기자
김미라 대학노조 성공회대학지부 조합원. ⓒ 송승현 기자

복직만이 성과는 아니었다. 미라씨가 투쟁을 시작한 이후 몇 년간 성공회대에 비정규직 해고가 사라졌다. 2년이 지나도 자동으로 고용이 승계됐다. 대학노조 성공회대지부는 노조 단체협약에 육아·출산, 프로젝트성 사업 등에만 비정규직을 채용하고 이 또한 노조와 합의해야 한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미라씨는 일종의 무기계약직군으로 복직했는데, 임금·노동조건은 정규직보다 낮고 고용만 보장된 형태였다.

“복직해서 그해 겨울에 2차 투쟁을 시작했어요. 사실 복직 투쟁은 당사자 2명과 연대 단위가 했었거든요. 복직 후 투쟁은 지부 조합원과 함께했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아요. 다 같이 노조 조끼 입은 채 점심 먹고, 북 두드리며 학교 행진도 하고… 그 전 투쟁과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어요. 천막농성도 했는데, 다 같이 모여서 얘기하다가 또 사무실 들어가서 일하고, 이런 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이 투쟁 끝에 점진적으로 임금을 올려서 2018년까지 정규직과 같은 수준을 맞추기로 약속했고, 지금은 정규직과 같은 노동조건에서 같은 임금 받으며 일하고 있어요.”

2012년부터 미라씨는 학생복지처 장학금 업무를 맡고 있다. 2011년 반값등록금 투쟁 이후 교육부와 대학본부에서 장학금 규모와 종류를 대폭 늘렸고, 지원업무도 많아졌다. 일이 힘들기도 하지만 미라씨는 학생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

“있는 장학금을 배분하는 일도 하지만, 학생들이 장학금이 필요하다고 찾아오면 그에 맞는 종류를 찾아주기도 해요. 학생들의 학업을 지원하는 업무라 일의 보람을 느껴요. 반값등록금 투쟁 이후 국가장학금이 신설되고, ‘대학구조개혁’ 이라는 이름의 대학 구조조정, 대학 평가가 시작되면서 대학 노동자의 노동강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어요.”

올해 초 같은 성공회대지부 소속이자 학내 청소, 경비 등 업무를 맡는 비정규직 노동자 2명이 해고됐다. 미라씨는 이때 적극적으로 함께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남는다.

“부끄럽게도 제가 그 투쟁에 적극적으로 함께하지 못했어요. 함께 싸우는 게 당연한데, 직종과 고용형태가 다른 노동자들을 설득하는 게 꽤 힘든 일이었어요. 개인이 아닌 집단이 직종과 고용형태를 넘어 같이 투쟁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벽에 부딪힌 거죠. 분회 동지들의 해고에도 함께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힘들었고, 그래서 많이 미안한 마음이었어요. 노력한다고 했지만 많이 부족했고 내가, 우리가, 노동조합이 앞으로 꼭 풀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해요. 대학에도 교수, 행정직원, 미화·방호 등 직종에 따른 차별이 존재하는데, 그 벽을 허물고 차별 없는 세상을 다 같이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김미라 대학노조 성공회대학지부 조합원. ⓒ 송승현 기자
김미라 대학노조 성공회대학지부 조합원. ⓒ 송승현 기자

“집회문화, 노래와 몸짓이 오래돼서 문제에요?”

미라씨가 속한 대학노조 성공회대지부는 조합원이 60여 명 규모다. IMF 이후 1999년에 설립됐고, 작년에 노조설립 20년을 맞았다. 미라씨는 2012년 복직 후 간부 활동을 이어왔고, 대학노조 내 몸짓패 <천하무적>의 오랜 패원이기도 하다.

“2011년부터 몸짓패 활동을 시작해서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몸짓 연습이나 학습을 하고 있어요. 사실 제가 복직 투쟁 할 수 있던 원동력이 몸짓패였어요. 투쟁이 필요하다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계속 말해준 사람도 몸짓패 동지들이었고, 내 복직의 의미가 뭔지 일깨워준 사람도 몸짓패 동지들이었어요. 몸짓패에서 학습하고 토론하고, 다른 사업장에 연대 가면서 제 마음을 다잡게 됐죠. 복직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던 힘이에요. 제가 당당한 노동자로 살아갈 수 있는 건 몸짓패에서의 활동과 경험 덕분이에요.”

민주노총 조직혁신을 논할 때 집회문화는 빠지지 않고 나오는 주제다. 30년째 같은 노래, 같은 방식인데 어떻게 새로운 사람과 함께하겠냐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선배’들도 집회문화를 혁신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고 가끔 기고글까지 쓴다. 몸짓패 활동에 열심인 미라씨에게 이런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한편 공감하면서도 한편 고민이 들어요. 단순히 노래가 오래돼서 문제인가?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클래식과 비틀즈 노래를 계속 들을까? 집회뿐만 아니라 노동문화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다 너무 형식에만 갇혀있다는 생각을 해요. 한번은 총파업집회에 대중가수가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어요. 집회에서 문화선동이란 투쟁에 힘을 실어내는 것인데, 총파업을 결의하는 집회에 자본의 판에서, 자본의 논리로 노래하는 가수가 무대에 오르는 게 맞는 걸까? 이런 고민을 모아 동지들과 토론하고 노조에 의견서를 낸 적도 있어요. 집회 방식이 오래돼서, 촌스러워서, 라는 말들은 본질이 아닌 현상만을 보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미라씨는 문화패 활동을 오래 한 만큼, 비정규직 당사자로 자신의 싸움을 했던 만큼, 집회에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하려고 하는 만큼, 민주노총 집회문화에 고민과 비판이 많았다.

“사실 집회라는 게 내가 어떤 마음을 갖고 함께하는지, 이 투쟁이 정말 필요한 건지 공감하는 게 중요한 거잖아요. 그런데 집회가 판에 박히고 감흥 없게 된 게, 노래 똑같고 집회 순서 똑같은 탓인가요? 총파업 할 것도 아닌데 총파업 하자고 선동하는 집회에서 누가 감동을 해요? 말로만 투쟁을 선동하는 집회잖아요. 공감도 없고 감흥도 없고, 정말 의례적인 것들만 하고, 사람들은 의리로 그냥 앉아있고. 우리 그런 것 좀 바꿔야 하지 않아요? 집회에서 발언을 들을 때면 대표자들은 얼마만큼 고민하고 올라오는지 싶을 때가 있어요. 저희가 몸짓으로 무대에 설 때도 형식적인 몸짓이 되지 않게 하려고 정말 많은 고민과 토론을 하거든요. 집회가 투쟁사업장 동지들의 이야기도 듣고 정세를 공유하고 노동자의 투쟁을 선동하는 자리였으면 하는데,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말들만 들릴 때도 있어서 아쉬움이 많아요.”

미라씨에게 민주노총에 바라는 점을 물었더니 “보이는 것보다 노조다운 고민을 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민주노총이 1노총 되고 그걸 엄청 강조하잖아요. 1노총, 2노총이 뭐가 그렇게 달라요? 조합원 수 차이죠. 2노총이라고 우리가 못한 게 있나요? 그런데 지금은 보이는 숫자를 너무 강조하게 된 것 같아요. 노조가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은 없고요. 새로운 조합원들이 많잖아요. 우리는 이분들과 어떤 민주노총을 꿈꾸고 있는 거죠? 그런 토론은 아무 데도 없지 않나요? 노조가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노조여야 하는가… 고민은 없고 조직만 늘리는 것 같아요. 민주노총이 노동조합답게,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함께 바꿀 수 있는 길을 꿋꿋이 갔으면 좋겠어요. 옳은 길을 가면 사람들이 조금씩이라도 함께하게 되는 거고, 우리는 그 길을 걸어온 거잖아요.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민주노총, 그 옳은 길을 앞장서서 나아가는 민주노총이었으면 좋겠어요.”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노동과세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