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50주기 여성노동자 인터뷰]
방과후강사, 박지은

2020년 전태일 열사 항거 50주기를 맞았다.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를 외치고 산화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한 것은 노동자의 권리였다.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 고발이었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열악한,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지키고자 했다. 민주노총은 여전히 불평등에 맞서는 여성노동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지금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노동과세계〉에서 소개한다. [편집자주]

 

“아이들 미래 열어주고 찾아주는, 방과후수업 노동자입니다”
방과후강사, 박지은

박지은 서비스연맹 방과후강사노동조합 서울지부 지부장. ⓒ 송승현 기자
박지은 서비스연맹 방과후강사노동조합 서울지부 지부장. ⓒ 송승현 기자

박지은입니다. 서비스연맹 방과후강사노동조합 서울지부장을 맡고 있어요. 노동조합 이름처럼, 저는 초등학교 아이들 방과후수업을 담당하는 방과후강사입니다. 올해로 11년 차예요.

저는 한자 수업을 하고 있어요. 본래 전공이 한문학이기도 하거든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느낀 게, 고학년이 되면 한자 공부가 필요하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학교 한자 수업은 단순 암기에 그친다고 하더라고요. 아이들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요. 그래서 생각했죠. ‘내가 한자 수업을 만들면 어떨까?’라고요. 그 후 2년 정도 방과후수업을 준비했어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재밌었어요. 예전에는 학습지 교사도 잠깐 했고요. 방과후강사든 학습지교사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직업이잖아요? 고용 불안전성을 기반으로 한 직업이니까요. 그래도 아이들을 가르치면 행복했어요. 그래서 11년 동안 강사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방과후수업은 학교마다 달라요. 어떤 수업을 배치하고 누굴 채용하는가도 모두 학교장 재량이에요.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모든 초등학교 홈페이지를 다 찾아봤어요. 학교마다 공고도 다르니까요. 저는 처음에 세 학교에서 수업했거든요, 대체로 경험이 없는 강사는 채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저는 처음부터 잘 된 경우죠. 저는 한문학 전공자에다 중등교사자격증도 있어요. 그래서 더 유리했던 것 같아요.

우리 교육은 대체로 국영수 위주잖아요. 반면 방과후수업은 다양한 과목을 배치해요. 본래 이 제도가 예체능교육에서 시작했거든요. 사교육을 흡수하고 사교육을 대체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자고 한 거니까요. 그렇다고 마냥 노는 게 아니라 학습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고요.

학교 끝나고 학원에 가야 하는 아이들이 방과후수업에서 안정감, 편안함을 느끼기도 해요. 제가 하는 한자 수업만 해도 쓰고 외우게만 하지 않거든요. ‘한자의 마블’이라고, 주사위 던지는 부루마블을 응용한 방식으로 수업해요. 퀴즈나 미로찾기도 응용하고요. 무엇보다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고 지겨워하지 않는 수업을 하려는 거예요. 나중에는 방과후수업에서 자기 적성을 찾는 아이들이 있으면 좋겠고요.

제 아들이 22살인데요, 어릴 때 방과후학교에서 로봇 수업을 오래 들었어요. 그때 교구 값만 백만 원 넘게 쓰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런데요, 로봇이 자기 적성이래요. 특성화 고등학교에서 로봇 시스템을 전공하더니 지금은 반도체 회사에 들어가는 자동화 시스템 설비‧설계하는 일을 해요. 꼭 대학에 가지 않아도, 꼭 자격증을 따지 않아도 자기 적성을 찾아서 자기 일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방과후강사를 하면서 가진 목표도 그런 거예요. 방과후수업은 사교육을 대체하고 사교육을 흡수하기 위해 시작된 거잖아요. 그러니 다양한 과목을 편성해서 아이들에게 적합한 교육을 할 수 있길 바라는 거죠.

과목이 다양한 만큼 방과후강사들도 수가 많아요. 해마다 수업이 바뀌는 것처럼 강사들도 매년 바뀌죠. 방과후강사는 연 단위로 계약하거든요. 그런데 말이 좋아 연 단위인 건지, 3개월 계약을 1년 동안 4번에 걸쳐 ‘연장’하는 거예요. 그렇게 1년을 보내면 2월에 다시 면접을 봐서 수업을 ‘따내야’ 하고요. 그 사이에 학교장 수업을 없애면… 그럼 저는 내년에 그 학교에서 수업을 못 해요. 이런 체계는 교육청이 만든 거예요. 방과후강사가 한 학교에서 안정적으로 일하지 못하게 해놓은 거죠.

이유요? ‘그렇게 함으로써 방과후수업의 퀄리티가 높아진다’라는 거예요. 고용상태가 불안정할수록 강사들이 경쟁에 돌입하고, 그럼으로써 수업의 질이 높아진다는 거죠.

실제로 방과후강사들은 어마어마하게 경쟁을 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었으니까요. 강사 중에는 박사 학위를 딴 사람도 있고 계속 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도 있어요.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하기도 하죠. 오로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예요.

3~5월, 6~8월, 9~11월, 12~2월, 원래는 이렇게 계약을 진행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기간이 1년에서 11개월로 줄었더라고요. 3월 중순에 1분기가 시작해 다음 2월 중순에 4분기가 끝나더라고요. 그렇게 11개월 수업으로 바뀌었죠.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지 않으려는 꼼수라고 생각해요. 학교 입장에선 ‘휴~ 하나 줄었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죠. 맞벌이 가정 입장에선 한 달이 비는 건데, 그 공백 메우려 다시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민원에도 신경을 써야 해요. 방과후강사 일과가 1~3시는 저학년, 3~5시는 고학년 수업인데요, 저학년 아이들 귀가지도도 업무에 포함돼있어요. 그 사이에 고학년끼리 싸움이 나면, ‘선생님이 없어서 아이들이 싸웠다’ 이런 말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 민원이 생기면 학교는 강사를 잘라요. 아니, 계약 해지를 하는 거죠. 민원 발생으로 인한 계약 해지.

공무원 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게 민원이잖아요. 학교장이 양쪽 입장을 다 들어주는 경우는 드물어요. 귀찮으니까 방과후감사 계약을 해지하는 거죠. 그런 일이 터지면 남은 기간은 그 수업 자체가 사라져요. 새로 강사를 구할 수도 없는 시기니까요.

계약 해지도 그렇지만, 학교 내에서 방과후강사를 외부인으로 보는 시선도 있어요. 방과후강사는 수업 준비물을 직접 다 들고 다녀야 하는데, 학교에 따라서는 ‘외부인이라 주차를 할 수 없습니다’라고도 해요. 그러면 먼 곳에 주차하고 낑낑거리며 짐을 옮겨야 해요. 그것도 매일.

면접 일정이며 계약 해지, 수업 준비 등 여러 면에서 방과후강사들의 처우가 좋지 않지만, 이걸 어디에 말하겠어요. 성희롱같은 별의별 일이 다 있어도 강사들은 아무 말 못 하거든요.

그래서 2015년에 학교비정규직 내에서 권익실현센터로 노동조합이 시작했어요. 일단 조합원들을 모았죠. 강사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요. 그땐 정말 우리를 대변해주는 사람들이 누구도 없었거든요. 2년 정도 활동하다가 2017년에 노동조합으로 발족했죠. 저도 권익실현센터 때부터 있다가 노동조합 출범에 함께했죠.

노동조합이 필요했어요. 너무 절실했거든요. 지금도 절실해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올해 코로나19 겪으면서 몇 달 동안 일을 못 해도 교육청은 묵묵부답이니까요. 또 노동조합을 통하지 않았으면 안 됐을 일들을 겪고 나니 더 절실해졌죠.

노동자의 권리는 없다시피 하니까요. 그래서 저희 목표의 1번이 노동자로 인정받는 거예요. 교육청 소속이 돼서 방과후수업 자체가, 또 방과후강사의 가치가 인정받으면 좋겠어요.

강사들은 자신이 즐거워서 수업을 하는 분들도 있어요. 굳이 방과후수업을 안 해도 되지만, 학교라는 공간에서 아이들과 어울리는 게 좋은 거죠. 이런 강사들이 질 높은 수업을 제공하는데도 교원자격증이 없다거나 시험을 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외부인 취급하는 건 잘못된 거죠. 그런 인식도 잘못됐고 교육청의 대처도 정말 잘못됐어요. 이 인식을 바꾸는 게 저희의 두 번째 목표예요. 그러려면 노동자로서의 대우가 먼저겠죠.

방과후강사 대부분이 여성노동자예요. 그러다 보니 ‘남편이 돈 벌어오잖아?’라는 시선을 받기도 해요. 아마 여성노동자가 많은 사업장 대부분에서 그럴 텐데요, 이건 노동의 본질과는 관계없는 문제예요. 저 역시도 여성노동자로서 일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거든요. 남자든 여자든 같은 입장에서 일하는 거고 성향상 차이점만 있을 뿐이잖아요.

아직은 노동계가 남성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생각해요. 엄마인 노동자도 있고 가정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남성노동자들처럼 할 수는 없을 때가 있어요. 남성노동자들의 투쟁이 하나의 정석처럼 여겨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래전에 친구 남편이 폭발사고로 목숨을 잃은 일이 있었어요. 가스사고였는데, 1주일 가까이 전신화상으로 고생하다가 떠났거든요. 사정이 있어서 저도 함께 병원에 다녔는데요, 그 뒤로 제가 1년을 넘게 앓았어요. 위장 장애에 편두통까지…. 화상이라는 고통을 직접 겪은 건 아니지만, 화상의 고통이 어떤 건지 간접적으로 알았죠. 전태일 열사의 분신도 그래서 더 끔찍하게 느껴졌어요.

우리 집 큰 아이가 24살이에요. 작년에 전태일 평전을 읽는데 전태일 열사가 목숨을 잃은 나이도 스물셋이었잖아요. 우리 딸은 아직도 철딱서니가 없는데, 전태일 열사는 그 나이에 이미 사회의 고난을 책임진 거잖아요. 어린 나이에 사회의 부조리를 혼자 짊어지고 가다가 결국 견뎌내지 못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모로서 그게 용납이 안 됐어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아이들이 제2의 전태일이 되는 걸 막자.’ 그게 부모 세대인 제가 할 일이란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전태일 열사는 훌륭한 사람이지만, 그가 분신하게 한 사회를 만든 건 결국 어른의 책임인 거니까요. ‘우리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과후강사로서도, 노동조합 조합원으로서 가진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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