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세계 필진 개편과 함께 김정수 선생님께서 <99%를 위한 노동안전보건> 코너를 담당하게 됐습니다. 김정수 선생님은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로 현재 향남공감의원에서 모두의 안전과 건강을 위한 진료와 치료에 몰두하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하는 사회를 꿈꾸며 한국노동안전보건 연구소에서 활동하며 안녕한 일터의 안전한 노동자들을 위한 연구활동에도 매진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현장에서 발생하는 재해들,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하고 안전을 침해하는 제도와 정책들은 최근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가장 주요한 이슈입니다. <99%를 위한 노동안전보건>은 안전하게 일하고 죽지않을 권리, 안전한 일터에서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지난 해에 이어 계속 <노동과 세계> 독자들께 전할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필자는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로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에 위치한 향남공감의원에서 근무 중이다. 본원은 노동안전보건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취약계층 노동자들의 건강증진을 목적으로 설립된 사단법인 공감직업환경의학센터의 부설 의원으로 2015년에 개원했다. 본원에는 필자를 포함하여 두 명의 직환의가 근무 중인데(올해 5월부터는 한 명을 추가로 채용하여 총 세 명이 근무할 예정이다) 직환의들은 일반 외래 진료와 함께 업무관련성 평가를 위주로 하는 직업환경의학 외래 진료, 산재 환자 진료, 특수 건강진단, 보건관리 대행 업무 등을 하고 있다. 필자와 같은 직업환경의학 전문의가 지역 주민과 노동자들을 직접 진료하는 동네 의원을 개원한 사례가 많지 않아 나름 주목을 받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멀리 타 지역에서도 찾아오시는 분들이 종종 있다.

얼마 전 어떤 환자로부터 본원에서 산새 신청이 가능한지 문의하는 전화가 왔다. 본원으로부터 차로 한 시간 이상 떨어진 곳에 사시는 분이고 업무관련성 소견서가 필요한 업무상 질병이 아닌 사고성 재해의 산재 신청에 관한 것이어서 집 근처 산재 지정 병원에서 신청을 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는데 꼭 오시고 싶다고 해서 그러시라고 했다. 진료실에서 사정을 들어보니 환자는 사무직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회사 관리자가 불법적인 일을 하라는 업무 지시를 했고 환자가 이를 거부하자 관리자가 환자를 폭행하고 회사는 이 일을 빌미로 환자를 징계 해고 했다고 한다. 환자는 노동위원회에 이를 제소했고 얼마 전 승소하여 복직판정을 받았는데 회사에서는 아직까지 아무 연락이 없단다. 관리자에게 폭행을 당한 후 어깨 통증이 심해 MRI 촬영을 했더니 어깨 힘줄 파열이 확인되어 현재까지 치료 중이고 폭행 당시 정신적인 충격으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도 받는 중이라고 했다. 어디선가 직장상사에 의한 폭행이 산재가 된다는 얘기를 듣고 산재 신청을 하려고 집 근처 산재 지정 병원 몇 군데를 찾아 갔는데 찾아간 병원마다 그런 경우 산재 신청을 해 줄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산재 신청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본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직장에서 업무 수행 중에 발생한 폭행은 업무와의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으면 업무상 재해로 산재 인정이 가능하다. 이 환자의 경우 관리자에 의한 폭행이 업무와 관련해서 발생한 정황이 명백하고, 노동위원회 승소 판결과 같은 관련 근거도 명확하므로 업무관련성은 매우 높았다. 다만, 어깨 힘줄은 퇴행성 변화에 의해서도 파열될 수 있으므로 환자의 어깨 힘줄 파열이 순간적인 외력에 의한 급성 파열이라는 소견을 추가로 받고 정신건강의학과 상병을 보완해서 본원에서 산재 신청을 하기로 했다.

환자는 본인의 얘기를 들어주고, 본인이 듣고 싶었던 얘기들을 해 주어서 너무 고맙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환자의 기구한 사연 말고도 안타까운 것은 환자가 산재를 회사에서 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산재는 재해를 당한 노동자 본인이 근로복지공단에 직접 신청(혹은 의료기관이 이를 대행)하는 것이고 과거에는 사업주 날인이라고 하는 것이 필수였는데 그것도 없어진지 오래라고 설명 드렸더니 몰랐단다. 그리고 산재 요양을 신청할 때 의사의 소견이 반드시 필요해서 이 환자처럼 의사가 소견 작성을 거부하면 산재 신청 자체가 상당히 곤란해진다. 산재 신청을 해 주는 의사와 병원을 찾아 다녀야 한다.

과거에 비하면 일하다 다치거나 아프면 산재로 신청할 수 있다는 사실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산재 신청 과정도 이전에 비해 다소 수월해졌고, 산재 승인율도 점점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 산재는 여전히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다. 몰라서 못하는 경우는 차치하고 알고도 못하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했다가 (회사측의 회유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4대 보험 중에서 가장 먼저 도입된 산재보험이 정말로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이런 산재보험의 근본적인 혁신을 위해 예전에 노동계와 안전보건단체를 중심으로 “선보장 후평가” 제도 도입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아직까지 전 사회적으로 진지하게 검토된 적은 없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 과연 우리나라에서 이런 법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려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결국 법이 만들어졌다. 덕분에 일하다가 다치거나 아픈 노동자들이 산재 승인에 대한 걱정 없이 치료를 받는 것도 언젠가는 가능할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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