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정상성은 ‘신체 건강한’, ‘젊은’, ‘남성’의 몸이 기준이다. 현재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이 원하는 ‘노동력’을 중심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남성이라도 자본이 원하는 노동력이 되기에 어리거나 늙으면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법과 제도에서 ‘장애인’을 정의하는 기준도 이 사회가 요구하는 노동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다. 재해를 입었을 때 보상을 판정하는 기준을 생각해보면 쉬운 얘기다. 여성의 몸은 신체 건강하고 젊더라도 노동력의 ‘재생산 도구’일 때만 정상으로 취급된다.

이게 바로 여성은 약하지만, 모성은 위대하다고 이 사회가 떠들어대는 이유이고, 나이가 차면(?) 아무라도 결혼은 했느냐고 물어보는 이유이고, 결혼했다고 대답하면 애는 있느냐고 물어보고, 아이가 없다면 이구동성 아이 타령을 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인 이유다. 그러므로 이 사회는 노동력을 재생산하지 않는 동성애자들의 사랑이나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자본과 국가는 언제나 우리의 성을 통제해왔다. 노동력이 남아돌아 문제였던 ‘둘(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시절엔 국가가 나서 예비군 훈련에서 정관 수술을 해주었고, 어떤 지역에선 보건소 차가 낙태 수술을 해주겠다고 홍보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시기 TV 프로그램에선 ‘내 아이, 이렇게 키워 하버드에 보냈다.’ 따위의 열혈 모성이 자주 등장하고, 드라마에선 일하는 엄마를 둔 아이들이 자주 가출을 한다. 한 마디로 여성은 집에 가서 애나 보란 얘기다. 이와는 반대로 노동력이 모자라서 문제가 되는 시기 TV 프로그램엔 성공한 여성 CEO와 여성의 재테크로 성공한 사례들이 자주 등장한다. 광고는 당구 큐를 멋지게 놀리는 여성을 등장시켜 ‘프로는 아름답다’고 선전했다. 평소 여성 노동의 현실에 조금도 관심이 없던 사회가 느닷없이 여성도 돈 벌러 나오라고 종용하는 것이다.

사회적 소수자란 성, 나이, 장애, 인종, 국적, 종교, 사상 등에서 국가나 사회의 지배적 가치와 기준을 달리한다는 이유로 차별의 대상이 되거나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이 사회에서 다수자일까, 소수자일까?

이 사회엔 전적으로 다수자인 사람도, 전적으로 소수자인 사람도 많지 않다. 가령 필자는, 재산이 없고 비정규 노동을 하는 비백인 여성이라는 점에서 소수자이지만, 결혼했고 아이가 있으며 태어나고 자란 나라에 사는 비장애인이라는 점에서는 다수자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 정체성만으론 설명되지 않는다. 따라서 필자처럼 이 사회의 대다수는 어떤 국면에선 사회적 소수자로서 차별을 받고 있지만, 또 어떤 국면에서는 다수자로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 당신은 어떠한가?

자본주의 사회는 이렇게 다양한 정체성으로 사는 사람들을 갖가지 구실로 줄 세워 수직적인 위계를 만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유지되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가 다 언급하지 못한 무수한 정체성이 그 위계에 포함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위계의 맨 꼭대기엔 누가 있을까? 서구에 사는 백인이며 돈이 엄청나게 많고 신체 건강한데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이성애자 남성이 있을 것이다. 반면 그 위계의 맨 아래엔 누가 있을까? 비서구에서 태어나 남의 나라에서 사는 흑인이며 돈이 없고 장애가 있고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은 레즈비언 여성이 있진 않을까? 필자는 다시 묻고 싶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그 수직적 위계의 어디쯤 자리하고 있는지.

필자에게 페미니즘은 인간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다양한 사람들을 줄 세운 불평등한 사회의 수직적 위계를 수평으로 돌려놓아, 모든 사람이 나란히 서게 하는 사상이며 실천이다. 당신에게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당신은 이러한 페미니즘의 편인가?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한창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10만 행동’이 진행 중이다. 당신이 그리는 평등한 세상이 만일 나와 같다면, 지금 당장 클릭하자. 10만 행동에 어떻게 동참하는지 보고 싶다면 여기로,  바로 ‘국민동의청원’에 동참하러 가고 싶다면 여기로 가시면 된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노동과세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