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한강 의대생과 평택항 청년 노동자.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 두 죽음을 대하는 세상의 다른 온도가 왠지 석연찮았다. 한 달 전쯤, 페이스북에 사람들이 왜 한강 의대생 죽음에만 관심을 갖는지 의구심을 토로했다. 그러자 답글 하나가 달렸다. 한강 사건에는 거대한 미스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미스터리라. 그 또한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강 사건은 언론의 과도한 의제 설정과 음모론에 기댄 유튜브 방송들의 난립으로 부풀려진 말풍선이 아니던가. 반면에 평택항 사건은 피해자는 있는데 관리 책임자들 모두가 결백을 주장하는 기이한 사건이었다. 도대체 이보다 더한 미스터리가 존재하는가. 1년에 자그마치 882명이 일하다 집에 오지 못하는 미스터리, 그런데도 누가 범인이고 가해자인지 도무지 밝혀진 적 없는 영구 미제사건들의 거대한 미스터리.

그즈음, 우연히 본 TV 뉴스 장면은 이 의문을 더욱 증폭시켰다. 한강 사건의 타살 가능성을 재현한답시고 마네킹을 이리저리 굴리는 뉴스 영상이었다. 아직 용의자로 특정된 것도 아닌데, 공중파 뉴스가 가상의 가해 장면을 버젓이 재현하고 있었다. 괴이쩍은 영상이었다. 문뜩, 그런 의문이 들었다. 산재의 책임자들은 왜 재현되지 않을까? 방송이든, 경찰 현장검증이든 그런 걸 본 적이 없다. 가해자를 특정하고 노동자의 죽음을 재현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걸까.

하기는 다큐영화 <액트 오브 킬링>에서는 큰일이 났다. 피해자들의 서사가 아니라, 가해자들의 서사와 가해 장면들을 재현하자 감춰진 진실이 드러났다. 이 문제적 걸작은 1965년 인도네시아 쿠데타 당시 100만 명이 넘는 공산주의자, 지식인을 학살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피해자 대신 가해자들이 주인공이다. 특히 스스로를 ‘갱스터’라고 부르는 정치깡패들이 영화 제작을 빌미로 40년 전 자신들이 사람들을 죽인 그 참혹한 순간들을 자랑하듯 태연히 재현한다.

“갱스터는 원래 '자유인'에서 유래했지.”

갱스터들이 가장 많이 반복하는 말이다. 웃는 얼굴로, 평온한 표정으로 계속 되뇐다. 스스로에게 ‘자유인’이라는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아무리 사람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세계, 윤리와 도덕이 진공상태가 된 세계, 가해자가 승리한 세계에서 이 정치깡패들은 실로 자유인이다. 한 늙은 갱스터가 가족들과 평화롭게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장면 위로 한 줄의 결정적 나레이션이 흐른다.

“우리는 허락 받았어요. 사람들을 죽였지만 처벌받은 적이 없다는 게 그 증거죠.”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은 그렇게 범죄자가 곧 자유인이 된 전도된 세계의 음란함을 폭로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저 말은 비단 인종학살에만 해당하는 걸까? 한 해 882명, 하루 평균 2.4명의 노동자들이 연쇄적으로 죽어 나가는 이 일상의 학살 속에서 과연 우리는 책임자들이 제대로 처벌받은 걸 본 적이 있는가. 기업 관료와 안전 감독관들이 산재사고에 관해 어떻게 처벌을 받는지, ‘위험의 외주화’ 시스템이 그 죽음들에 어떻게 책임을 지는지 본 적이 있는가.

고 이선호 씨 사망 이후 54일이 흘렀고, 그사이 무려 57명이 사망했다. 지게차에 깔리고, 발판에서 떨어지고, 수증기가 폭발했다. 그 순간에도 시청률에 환장한 언론은 한강에서 마네킹을 굴리고 있었다. 시민들도 선한 얼굴로 한강변을 배회했다. 또 우리는 평범한 얼굴로 저 죽음들을 잊고 있었다. 악의 평범성이란 윤리가 작동되지 않는 세계의 표정이다.

정부는 2021년에 사망사고를 감축하겠다고 했지만, 외려 1분기에만 2.1% 더 늘었다. 누더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책임자들이 빠져나갈 구멍들이 숭숭 뚫린 그물이나 진배없다. 이미 안전한 대기업 직원들만 더 안전해졌고, 50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만 더 위험해졌다.

자명하게도, 여기, 우리 시대에도 자유인이 존재한다. 아무리 노동자들이 죽어 나가도 처벌받지 않는 자유인, 책임의 속박에서 벗어난 갱스터들. 그들을 자유인에서 가해자로, 범죄자로 끌어내리지 않는 한 이 참혹한 미스터리는 계속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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