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의 동지로 만나는 페미니즘
명인의 동지로 만나는 페미니즘

아들이 어렸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왼손잡이인 아들이 죽어라고 오른손으로 글씨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엄마가 자랄 때와 달리 우리 집엔 아무도 너에게 오른손잡이가 되라고 강요하는 사람이 없는데, 힘들어 죽겠다면서 넌 대체 왜, 그런 연습을 하고 있느냐고. 아이의, 울분에 찬 비난이 속사포처럼 날아왔다. “엄마는 공책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자는? 키보드 숫자판이나 엔터키가 어느 쪽에 있는지는 알아? 카메라 촬영 버튼은? 화장실 물 내리는 꼭지가 어디 붙어있는지는 알아? 엘리베이터 버튼은? 손잡이를 어떻게 해야 문이 열리는지는? 가스레인지 손잡이를 어느 쪽으로 돌리는지는? 캔 따개나 감자 칼은? …….”

끝날 것 같지 않은 아들의 속사포에 나는 선 채로 돌이 된 듯 굳어버렸다. 그리고 최후의 일격. “대칭형 가위 사줬으니 안 불편한 줄 알지? 밥 먹을 때 젓가락질 안 걸리게 자리 잡아주면 단 줄 알아? 엄마조차 그러면서 왼손잡이여도 괜찮다면 내가 어떨 거 같아?” 나에 대한 아들의 비난은 차라리 비명이었고, 나는 그야말로 멘붕이 되었다.

정말 몰랐다. 아들이 일상의 거의 모든 곳에서, 그렇게까지 매 순간, ‘오른손잡이 중심’의 세상과 대결 중인 줄은. 한집에 사는 아들이 겪고 있는 일인데도 그랬다.

정말 몰랐다. 왼손잡이들이 겪는 현실을 모르는 채, 왼손잡이여도 괜찮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구역질 나는 위선인지. 이른바 인권운동을 한다는 사람이 그랬다.

그때까진 정말 모르고 있었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 이제 ‘남성 중심의 세상’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자.

교과서에 실려 있는 독립운동가 중에 여성의 이름은 몇이나 될까? ‘과학자’는? ‘우크라이나에서 중앙아시아까지 분포한 봉분에서 무기와 함께 묻혀있는 전사들의 해골이 발견되었다.’ 라는 문장에서 DNA 검사 결과 37%나 되는 여성 전사를 떠올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 ‘별도 지표가 없는 이상 남성’이라는 사고방식은 우리의 의식 깊이 박혀있다. 인류를 가리키는 통칭은 ‘남성(man)’이며, 역사는 ‘남성의 이야기(history)’니까. 그래서 우리는 ‘남성형 통칭’이 사용될 때 유명한 여자보다 유명한 남자를 떠올리고, 해당 업종 종사자의 절대다수가 남성이라고 추측하며, 해당 직책이나 공직에 남성 후보가 어울린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는 『보이지 않는 여자들』에서 말하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자동차 사고를 당했을 때 여성이 중상을 입는 비율은 남성보다 47% 높고, 사망 확률은 17% 높다. 자동차 설계의 역사에서 여성의 신체가 고려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적정 실내 표준 온도가 남성을 기준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남성이 적당하다고 느끼는 온도에서 여성은 추운 경우가 많다. 스마트폰은 성인 남성의 손 크기를 기준으로 설계되어 여성들이 더 떨어트리기 쉽고, 같은 이유로 피아노의 표준 건반은 87%의 여성 피아니스트에게 불리하다. 이 책은, 왜 여성은 화장실에서 더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 병원에서 더 자주 오진을 받고, 약효 없는 약을 먹고, 성폭력에 노출되고, 자동차 사고나 노동 현장에서 더 많이 다치는지, 왜 여성은 대가 없는 노동을 하고, 세금을 더 많이 내는지…, 고용과 승진, 각종 제품 설계, 의학, 정치, 노동, 도시 계획 등 그러니까 사실상 모든 것에서 여성이 얼마나 총체적으로 배제되고 있는지, 다시 말해 이 세상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으로 설계되어 있는지를 방대한 데이터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당신은 알고 있을까? 인류의 절반이 일상의 거의 모든 곳에서, 그렇게까지 매 순간, ‘남성 중심’의 세상과 대결 중인 줄?

당신은 알고 있을까? 여성들이 겪는 현실을 모르는 채, 성평등을 이야기하는 게 위선에 불과한 일인 줄?

당신은 알고 있을까? 당신이,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알려고 노력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세상이 오른손잡이 중심, 남성중심으로 설계된 것이 나와 당신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나와 당신이 ‘당연히’ 누리는 기득권을 성찰하는 것, 연대는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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