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의 동지로 만나는 페미니즘
명인의 동지로 만나는 페미니즘

“우리의 목소리를 ○○1)하라!”

세상에는 버스요금이나 지하철 요금이 얼마인지 평생 몰라도 되는 사람들이 있다. 최저임금이 얼마인지, 전셋값 폭등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사람도 있다. 매일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 시달리고, 매달 얼마 안 되는 월급을 쪼개 쓰고, 계약 기간이 끝나갈 때마다 불안해하며 집을 보러 다닐 필요가 없는 사람들.

전체 인구 대비 장애인은 5.1%이고, 성소수자는 3~7%나 된다는데 왜 내가 일하는 직장엔 장애인이 없는지 몰라도 되는 사람들이 있고, ‘내 주변엔 성소수자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건물에 경사로와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 식당에 좌식 테이블만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장애인 화장실’이라고 쓰여 있어도 전동휠체어를 타고 들어갔다 돌아 나올 수 없는 좁은 화장실에 그것도 청소도구가 쌓여있는 게 무슨 뜻인지 전혀 알 필요가 없는 사람들. 커밍아웃을 하면 어떤 질문과 시선을 견뎌야 하는지, 어떤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는지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던 사람들.

외모를 칭찬(?)하는 것이 어떤 상황에 왜 문제가 되는지, 선의로 한 말이 어떻게 차별이 될 수 있는지, 때로는 배려가 어떻게 폭력이 될 수 있는지, 농담과 성희롱이 어떻게 다른지, 어떤 말이 혐오 발언이고, 어떤 말이나 행동이 2차 가해인지, 풍자와 혐오가 어떻게 다른 건지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 문제는, 이런 언행이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사실에 주목하는 경우는 몹시 희귀하다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일단 발끈하며 반박부터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상황이 왜 문제인지 도무지 알 수 없으며(모르는 데 우선 배우려고 하진 않는다), 이런저런 이유로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그런데도 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 따윈 없다). 이런 사람들의 반박은 그들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문제’라는 거다.

한편, 질문을 가장하여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 몰라서 물어보는 건 줄 알고 진지하게 들어보면 사실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을 뿐,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을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질문은 정말로 알고 싶은 사람들이 들을 기회를 빼앗고, 함께 공부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리를 소모적인 논쟁 지형으로 바꿔버린다.

심지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사뭇 점잖고 진지하게 충고하는 사람들도 있다. ‘과거에는 문제가 아니었는데 시대가 바뀌어 문제가 되었으니, 배울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낙인부터 찍지 말고 친절하게 설명하라’면서. 하지만 80년대 독재정권 타도에 헌신(?)했던 남학생들이 ‘성’과 관련해서라고는 ‘선데이서울’이나 보면서 동료 여학생들의 외모에 점수나 매기고 있을 때도, 당시로선 구하기도 힘든 페미니즘 책을 구해 읽어가며 자기가 왜 차별과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사회적으로 규명해보려고 기를 쓰면서 문제를 제기해온 여학생들은 있었다. 30여 년 동안 싸워온 여성들의 목소리가 이제야 들리기 시작했단 말을 저리 당당하게 하는 자칭 타칭 진보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충고는 사실상 ‘어떻게’ 문제를 제기해도 듣지 않을 거면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방식’이 문제라서 혐오와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퍼뜨리는 효과를 낳는다.

어떤 지식은 ‘아는 게 권력’이다. 가령, 의사들의 의학지식 같은 것이 그렇다. 그러나 어떤 지식은 ‘몰라도 되는 게 권력’이다. 혐오와 차별에 대해 몰라도 사는 데 지장이 없었던 운 좋은 삶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권력을 함부로, 혹은 혐오와 차별을 재생산하는 데 사용하는 건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다. 교통비나 전셋값 폭등이 왜 문제인지 모르는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에 반대하고, 여성혐오를 노래로 만들어 퍼뜨린 사람이 지적받고도 성찰하지 않을 때 무대에 세우지 말자고 하는 것처럼.

나는 누구에게나 낙인부터 찍지 않고 친절하게 설명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몰라도 되는 권력’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늦게 오더라도 동지가 되려는 사람’을 환대하기 위해서다.


1) 우리의 목소리를 ○○하라!
필자는 이 문구를 2018년 ‘선거연령 하향 운동’을 하는 청소년들이 촛불집회에 갖고 나온 종이컵에서 처음 보았다. ○○ 처리된 글자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보자는 의미로 필자가 두 글자를 가린 것이다. 청소년들이 비청소년 동지들에게 하는 요청은 우리의 목소리를 ‘경청하라’도 ‘존중하라’도 ‘배려하다’도 아니었다. 필자에게도 새삼 깨달음을 주었던 그 두 글자는 바로, 우리의 목소리를 ‘공부’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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