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의 동지로 만나는 페미니즘
명인의 동지로 만나는 페미니즘

 

“요즘 여자들은 너무 예민해”
“요즘은 무서워서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나아”
“요즘은 겁이 나서 여학생들을 예뻐하지도 못해”
“요즘 여자들은 목소리가 너무 크고 기가 세”

독자 여러분도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보셨을까? ‘성평등 교육’ 시간에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흔히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이렇게까지 생각하진 않아도 사회 분위기가 달라졌고, 조심해야 한다고 여긴다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여학생부터 나이 든 여성에 이르기까지 ‘너무’ 예민하고 목소리가 커서 두려워하는 남성들이 이렇게 많아졌는데, 대체 왜 성범죄는 줄어드는 게 아니라 늘어나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오십 살 넘게 살면서 지금까지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한 번도 당해본 적이 없다는 여자’를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교사에게, 교회 오빠에게, 직장 상사나 동료에게, 남자 사람 친구에게 여자들은 말로든 신체 접촉으로든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강간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성폭력을 당해왔다. 성범죄는 학교, 직장, 거리, 버스나 지하철, 지하 주차장, 술집, 여행지, 심지어 집에서도 일어난다.

참 이상하다. 성폭력을 당했다는 여자는 이렇게 많은데, 자신을 가해자라 여기는 남자는 왜 이렇게 없고, 가해자로 몰릴까봐 억울한 남자는 왜 이렇게 많을까? 이상한 건 또 있다. 이렇게나 많은 여자들이 수시로 성폭력을 당하는 동안, 가해자가 아닌 다른 남자들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을까?

크고 작은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에게 흔히 나오는 반응은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어.” 이거나 “어떻게 그 사람마저?”인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이 사실은 성폭력은 ‘특별한’ 사람이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문제는 평소에 성폭력과는 아주 거리가 멀 것 같은 평범한(?) 남성도 분위기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성폭력을 저지를 수 있는 문화와 관련이 있다. ‘그래도 되는 문화’ 말이다.

직장에서건 어디에서건 여자들을 만나면 ‘외모’부터 관심이 집중되는 문화, 여성들의 외모는 함부로 품평해도 되는 문화, 사근사근 웃어주는 여자가 직장의 꽃인 문화, 기왕이면 술은 여자가 따라야 맛이 나는 문화, 노래방이라도 가면 여성 도우미를 불러야 흥이 사는 문화, 룸살롱이 있어야 비즈니스가 되는 문화. 다시 말해 생각하고, 의견을 갖고, 토론하고, 활동하고, 일하는 한 사람을 동등한 인격체 이전에 ‘성적’ 존재로 ‘대상화’하는 문화 말이다. 이런 문화에선 성폭력은 ‘그래도 되니까’ 저질러진다.

이런 문화 속에서 그동안 여성들은 참고 또 참아왔다. 아무리 불쾌해도 분위기를 흐릴까봐 참고, 아무리 힘들어도 당한 사람이 되려 망신을 당할까봐 참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괴롭힘을 당하거나 짤릴까봐 참고.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좀 달라졌다. 더는 참지 않기로 한 여성들이 생겨난 것이다. 예민하고 목소리 큰 여자들 때문에 세상 살기 무서워졌다며, 억울해하는 남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나는 정말로 궁금해졌다. 담임 새끼가 점심시간마다 교실에서 발육이 빨랐던 5학년 여학생이던 내 몸을 더듬어댈 때, 내가 수도 없이 불쾌한 외모 평가나 성적 농담을 들을 때, 만원 버스에서 내 엉덩이에 성기를 비벼대는 새끼에 내가 쩔쩔맬 때, 오빠라고 부르라는 직장 상사에게 싫다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날아오는 맥주잔에 두피가 찢어졌을 때, 회식 자리에서 옆자리에 앉은 상사가 자꾸만 내 허벅지를 치며 친한 척을 할 때, 노래방에선 싫어하는 남자 선배가 블루스를 추자고 할 때……, 그 모든 순간에 단 한 번이라도 제지해주는 남성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러시면 안 된다고, 이건 성희롱 혹은 성추행이라고, 아니 그건 너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면, 그 자리에 있던 남성 중 누구라도 헛기침이라도 크게 한 번 해줄 순 없었을까?

그렇다면, 여성들이 민감한 것이 아니라 남성들이 더 민감해져야 하는 게 아닐까? 여성들의 목소리가 큰 게 아니라 관행을 묵인해주지 않는 남성들이 목소리가 더 커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건 괜찮지 않다’고, ‘이런 말, 이런 행동은 당장 멈춰야 한다’고. 당신이 정말로 성폭력 없는 세상을 바란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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