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수의 99%를 위한 노동안전보건
김정수의 99%를 위한 노동안전보건

얼마 전 용광로 부근에서 고온과 소음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며 장기간 교대로 일하다 심장질환으로 사망한 노동자의 사망을 산업재해로 인정한 법원의 판결이 있었다. 해당 노동자가 일하던 회사는 경영상의 이유로 휴업을 반복적으로 실시했고, 이로 인해 해당 노동자의 사망 전 12주간, 4주간 주당 평균 업무시간은 각각 40시간, 22시간이었다고 한다. 근로복지공단은 업무시간이 짧다는 이유로 업무상 질병이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법원은 업무상 질병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전부터 이와 유사한 사례가 반복되어 왔다. 근로복지공단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제34조(업무상 질병의 인정기준)와 그에 따른 고용노동부고시(‘뇌혈관 질병 또는 심장 질병 및 근골격계 질병의 업무상 질병 인정 여부 결정에 필요한 사항’, 고용노동부고시 2020-155호)에 근거하여 업무상 질병 인정 여부를 결정한다. 고용노동부고시에서 업무시간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기준이다. 그런데 대법원은 오래전부터 산재보험법 시행령은 업무와 재해와의 상당인과관계를 판정할 때 예시적 기준에 불과하다고 일관되게 판시해왔다. 그에 따른 고용노동부고시 역시 근로복지공단에 대해 행정기관 내부적으로 업무처리지침이나 법령의 해석․적용 기준을 정해 주는 행정규칙에 불과해서 대외적으로 국민과 법원을 구속하는 효력이 없다.

뇌심혈관계질병 발생에 있어 업무시간(장시간근로)이 다른 요인들에 비해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여러 연구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고용노동부고시는 이런 연구결과들을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집단적인 수준에서 그렇다는 것으로 개별적인 사례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많다. 그러므로 개별 사례의 업무관련성을 판단할 때 고용노동부고시가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실제 판정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기준으로 활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몇 년간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 참여해 본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다음 몇 가지 이유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첫째, 업무시간이 다른 요인들에 비해 객관화, 정량화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질판위에서 신청 상병의 업무관련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근거가 필요하다. 심의과정에서 여러 가지 근거들을 검토하는데 이 중에서 조사자 혹은 판정위원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큰 것들(예를 들어, 정신적 긴장, 유해한 작업 환경 등)에 비해 그렇지 않은 것들(예를 들어, 업무시간, 교대제 업무, 휴일이 부족한 업무 등)이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되는 경향이 있다. 둘째, 심의과정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다보면 유사한 사례를 반복적으로 접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형평성을 염두에 두게 되는데 이때 보다 객관적이라고 판단되는 요인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고려하게 된다.

업무관련성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객관성, 형평성을 담지하고자 하는 노력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업무시간이 절대화되고 다른 요인들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이런 관행을 어떻게 개선시킬 수 있을까? 올해 산재인정기간단축 문제가 노동안전보건분야의 핫 이슈 중 하나였다. 그 대책 중 하나로 근골격계 질병의 경우 당연인정기준 적용대상 확대 방안이 제기되었고 고용노동부에서도 이를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이런 당연인정기준을 뇌심혈관계 질병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즉, 객관화, 정량화가 용이한 업무시간과 일부 업무부담가중요인이 기준을 충족하는 경우 자문의 혹은 특진기관의 소견을 근거로 질판위 심의 없이 업무관련성을 인정한다. 기준을 충족하지 않은 경우에는 정신적 긴장, 유해한 작업 환경 등 객관화, 정량화가 어려운 부분에 대해 추가적인 조사 이후 질판위에서 심의한다. 이렇게 하면 기존에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검토와 고려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일부 인정기간단축 효과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면서 노동자들의 근무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고 노동자들의 일이 편해졌는가? 누구도 그렇다고 얘기하기 힘들 것이다. 현재와 같은 관행이 지속될 경우 뇌심혈관계 질병으로 쓰러지는 노동자들은 줄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는 노동자들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사회가 변하면 업무상 질병에 대한 판단 기준도 바뀌어야 한다. 뇌심혈관계 질병의 업무관련성을 업무시간을 위주로 판정하는 관행은 시급히 개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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