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의 동지로 만나는 페미니즘
명인의 동지로 만나는 페미니즘

‘순박한’ 농민, ‘순수한’ 아이들, ‘꽃다운’ 청춘, ‘천사 같은’ 장애인, ‘위대한’ 어머니…….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이다. 특히 안타까운 희생자가 생겼을 땐 정당이나 시민단체의 성명서, 정부나 고위 공직자의 발표문, 언론에도 수없이 등장하는 말들이다.

얼핏 보면 긍정적인 말이고, 특히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을 땐 목격자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더하는 말이기도 하다. 가령, 농민운동가 백남기 선생이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을 때 줄줄이 따라붙었던 수사가 바로 ‘순박한’ 농민이었다. 대체 이런 표현에 어떤 ‘정치적 맥락’이 있다는 말인가?

첫째, 사람은 한 가지 정체성으로 호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백남기 선생은 농민이었지만,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을 거치는 동안 독재와 맞서 싸웠던 민주화 운동가였고, 한때는 가톨릭 수사였으며, 농민운동에 평생을 바쳐 온 농민운동가였고, ‘우리밀 살리기’와 땅을 살리는 ‘되살이 운동’에 헌신한 대안 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그가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지자 그는 ‘단지’ 순박한 농민으로 호명되어야 했을까? ‘순박한’이란 사전에서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순수하며 인정이 두텁다’는 뜻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순박한 ‘대학교수’, 순박한 ‘국회의원’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결국, 농민 앞에 따라붙는 ‘순박한’이란, ‘순하고 착하지만 세상 물정엔 어둡고 어리숙한’이라는 뜻이 아닌가? 과연 백남기 선생이 그런 사람이었나? 그 수식어가 그의 일생에서 지운 것들이 과연 사소한 것일까?

둘째, 백남기 선생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경찰의 과잉진압과 정권의 폭력성을 드러내려면 농민은 단지 순박하고, 아이들은 단지 순수하고, 젊은이는 꽃답고, 장애인은 천사 같아야 하는 걸까? 순박한 농민이 아니라 성질 고약하고 세상 물정에 밝은 농민운동가라면 그렇게 죽여도 되는 건가? 순수하고 꽃다운 청춘이 아니라 영악하거나 세상 때가 묻은 사람이라면 함부로 희생되어도 괜찮은가? 나쁜 장애인은 인권을 누릴 자격이 없고, 자식을 위한 희생보다 자신의 삶을 먼저 고려하는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피해 상황에서의 이 수식어들은 결국, 기본적인 인권이란 그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누려야 하는 보편적인 권리라는 사실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셋째, 일상에서는 이 말들이 어떻게 작동할까? 쌀값 보장을 외치고 농산물 가격을 문제 삼는 농민은 순박한가, 순박하지 않은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최저임금 이상은 꼭 받아야겠다고 또박또박 따져대는 아르바이트 노동자를 사업주들은 똑똑하다 하는가, 영악하다 하는가? 노동자의 안전과 권리를 보장하라며 파업하는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의 역군인가, 시민을 볼모로 하는 이기주의자들인가? 비청소년의 인권침해를 문제 삼거나 자신의 권리를 알토란 같이 주장하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은 순수한 건가, 싸가지가 없는 것인가?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에 떼로 몰려나와 단지 버스나 지하철을 타겠다고 외치는 장애인들은 천사인가, 불편한 존재들인가? 자신의 삶과 어머니로서의 삶 사이에서 늘 줄타기를 하며 살아야 하는 여성들이 ‘위대한 모성’에 짓눌릴 때, 대체 아버지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다양한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이상 참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찾고자 할 때 쏟아지는 무수한 비난들은 평소 그들을 가두었던 수사들과 정말로 아무 상관이 없을까?

끝으로, 여성의 경우엔 앞에 어떤 수식어가 따라붙든 ‘여성’ 자체가 수식어다. 직장의 꽃이든 촬영장의 꽃이든 여성 앞엔 꽃이라는 아름다운 수식어가 붙을 때가 많지만, 여성이면 직원이 아니라 여직원이고, 배우가 아니라 여배우라는 점에서 수식어가 이중으로 따라붙는 것이다. 작가도, 교사도, 프로그래머도, 경찰도 여성이면 반드시 앞에 ‘여’자를 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사회다. 훈련으로 단련된 근육질의 수영 선수도 여성이면 ‘인어공주’다. 프로답게 자기 일을 잘하는 요리사가 남성이면 그냥 셰프인데 여성이면 ‘당찬’ 셰프다. 이 말엔 시원찮은 ‘여성인데도’ 잘한다는 뜻이 숨어있다. 이 말들은 결국, 여성은 어디에서든 꽃이거나 공주로 대접받을 때가 행복하고, 여성인 주제에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일하고 인정받으려면 이 사회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당차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이런 게 바로, 별로 나쁜 말이 아닌 것 같은데도 쌍심지를 켜는 사람들,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벼드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언어의 정치성’이다. 차별과 혐오는 이렇게, 비하나 낙인만이 아니라 ‘시혜’로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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