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아이 안 낳으려고요. 못 할 짓 같아요.” 얼마 전, 같이 작업하는 스텝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그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고 했다. 가뜩이나 불평등으로 얼룩진 세계인데, 기후와 환경까지 망가진 곳에 어떻게 아이를 낳겠냐는 것.

하기야 ‘기후 출산파업’ 운동이 등장하는 시대다. 세계 지도자들이 기후위기 해법을 제시하지 않으면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캠페인. 또 세계 곳곳의 여론조사에서도 기후위기가 출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대답이 쏟아지고 있다. 출산 행위 자체가 죄의식이 되는 기이한 세계.

아마도 영화사에서 ‘기후 우울증(Climate Depression)’을 처음으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기록될 <퍼스트 리폼드>(2017)에서도 출산을 기피하는 젊은 환경운동가가 등장한다. 처음 만난 교구 목사에게 자신의 우울증을 토로한다. 지구는 계속 뜨거워지고 해수면 상승, 감염병 유행, 가뭄, 식량위기로 점철될 이 세계에서 도저히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것이다. 임신한 아내에게 낙태를 권할 뿐 아니라 환경오염 기업에 대한 폭탄테러를 계획할 정도로 불안증과 분노조절장애에 시달리는데, 끝내는 머리에 총을 쏴 삶을 마감한다.

이 청년과 상담하던 교구 목사도 자살 현장을 목도한 후, 점차 청년의 시선에 동화된다. 기후와 환경, 불평등과 기득권의 전횡 등 전에는 보지 못했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면서 그 자신도 분노와 무력감에 휩싸인다. 과연 인류에게 구원은 존재하는가? 왜 항상 약자들만 더 힘든가? 폴 슈페이더 감독의 말년의 걸작 <퍼스트 리폼드>는 종교의 외피를 빌려 기후위기 시대 속에서 병들고 분노하는 영혼들의 떨림을 서늘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결국 그 교구 목사는 반환경 기업의 오너들과 부패한 교회의 결탁을 벌하기 위해 청년이 남겨 놓은 폭탄 조끼를 꺼내 입는다.

기후 우울증은 이미 우리 시대의 만성질환이다. 영국의 6개 대학이 10개국 청년 1만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60%가 기후위기에 대해 극도로 염려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 응답자의 45%는 기후위기가 일상생활에 영향을 준다고 대답했다. 폭염과 홍수, 가뭄 등을 겪은 지역에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도 겪고 있다.

그리고, 한 달 전 어느 비극적인 죽음. 고성 삼천포발전소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발전소 폐쇄 때문에 이직에 대한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기후 우울증은 이제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으로까지 퍼져나가고 있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발전소 폐쇄에 따른 불안을 느끼는 노동자는 92.3%에 달했다. 하지만 다른 일자리가 준비된 비정규직 노동자는 4.3%에 불과했다. 2021년 현재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2만5천여 명. 이들 모두가 풍전등화의 실직 위협 속에 놓여 있다. 내연기관 산업의 경우, 2030년까지 48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기후위기는 곧 일자리의 위기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라는 게 고작 직업재교육과 일자리 알선. 그마저도 비정규직은 해당 사항이 없고, 대부분 사용자 지원 중심으로 설계된 대응책이다. 탄소중립이라는 명목하에 기업들의 그린워싱을 독려할 뿐, 노동자와 농민 등 가장 먼저 고통이 당도한 기후위기 최전선 주체들에게 외려 그 피해를 전가하고 있다. 아무리 탈탄소 경제로의 전환이 불가역적이더라도, 기후위기를 야기한 자본주의 시스템에 책임을 묻지 않은 채 당사자들이 홀로 고통을 감당하도록 방치하는 방식은 어떤 해법도 제공하지 않는다.

당연히 이렇듯 책임이 부재한 세계에서 기후 우울증이 유령처럼 떠돌 수밖에 없다. 썩어가는 농작물을 끌어안고 시름에 잠긴 농민들이든, 고용불안의 두려움에 잠식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이든, 출산을 포기하고 미래를 사산하는 청년들이든. 앞으로 지구가 뜨거워질수록, 병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어느덧 우리 시대의 가장 어두운 팬데믹이 된 기후 우울증. 그런데도 기후위기를 자초한 자본주의 체제는 책임을 지기는커녕,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해는 사회화’하면서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책임과 불안을 골고루 떠안기고 있다. 기후 우울증이 더욱 만연하는 이유다. 여기에 더해, 탈탄소 사회로 전환하자는 논의 테이블에서도 기업 위주 지원만 설계할 뿐, 당사자인 시민 주체들을 철저히 배제하거나 들러리로 객체화하고 있다.

어쩌면 기후 우울증의 유일한 처방전이란 정확히 책임을 가리고, 그 반석 위에 ‘기후정의’를 정초하는 일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최전선 주체들인 노동자, 농민, 청년, 지역민, 시민 등이 전환의 테이블에 민주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기후위기와 절연할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을 사회에 먼저 제안하는 것으로까지 도약해야 한다. 더 이상 상실도 없고 배제도 없는 상호부조의 과정, 그게 처방전이다. 그대로 우울함에 익사하느니, 새로운 세계를 향해 함께 뛰어가는 게 낫지 않겠나. 사실, 머뭇거릴 시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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