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 하늘의 노래가 되다
민중가수 박은영 인터뷰
노동자의 영원한 동지, 민중가수 황현이 하늘로 떠났다. 우리는 11월 19일로 그의 49재를 맞는다.
<노동과세계>는 그를 기억하기 위해 그를 가장 가까이서 알았던 한 사람을 찾았다. 황현의 절친이자, 함께 노래 불렀던 민중가수 박은영을 10일 정동길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카페에서 만났다.
박은영은 인터뷰를 진행하며 많이 울었고, 가끔은 웃었다. 노래길, 인생길을 함께 걸은 동지를 떠나보냈다는 슬픔과, 너무도 따스했던 그와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저절로 뜨이는 미소가 수없이 교차하는 듯 했다.
황현. 겉과 속이 똑같았던 사람, 사람을 사람으로 온전히 좋아했던 사람, 모두에게 사랑받았던 사람이었다고 박은영은 말했다. 친구가 한 친구를 떠나보내며 되뇌인 추억을 정리했다.
황현과 박은영은 1992년 백기완 선대본 문선대에서 각 ‘서대노련’과 ‘노래공장’ 소속으로 처음 만났다. 이후 박란희와 1994년 ‘초록지대’를 꾸려 함께 노래했고, 2012년부터는 ‘다름아름(다름이 아름다운 세상)’이란 이름의 듀엣조로 활동했다.
두 살터울의 두 사람은 노래 이외에도 많은 것들을 함께했다. 둘은 비슷한 시기 결혼을 했고, 엄마가 됐으며, 책도 같이 읽었다. 다시 본격적으로 마이크를 잡기로 결심한 시기도 비슷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매일같이 소소한 고민부터 중요한 선택까지 함께 나누며 30년을 보냈다.
숙명여대 노래패(한가람) 출신의 황현이 민중가수의 길을 걷기로 한 이유는 여느 문화 노동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모르고 평생 살았으면 몰라도, 알게 된 다음에야 투쟁하는 자들을 위해 노래부르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길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를 비롯한 약자들이 어떤 식으로 착취당하는지 보았다. 노동자가 생산의 주인, 분배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노래했다.
노동자에 대한 애정은 자연스레 장애인에게로 넘어갔다. 노동운동을 하다보면, 장애인운동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장애인이야말로 한국사회 곳곳으로부터 소외받는 사람들이었다. 동시에 한국사회에서 가장 크고 전투력이 갖춰진 곳 또한 장애인 투쟁현장이 아닌가. 다름아름의 <턱을 헐어요>는 바로 이런 장애인 동지들을 위한 헌사다.
추위를 무지막지하게 타는 두 사람에게 겨울은 특히나 고달픈 계절이었다. 옷은 너댓개 껴입고, 목도리를 칭칭두르니 곰처럼 보인다며 종종 웃곤 했단다. 황현은 노래하는 우리가 이렇게 추운데, 이 거리에서 노숙하는 동지들은 더 추울 것 아닌가 해서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투쟁이 길어지는 ‘장투사업장’에 갈수록 더욱 커졌다고 박은영은 추억했다.
굳이 따지자면, 황현은 에너지를 주는 사람에 속했다. 투쟁현장에서 황현을 본 사람들은 ‘엄청나게’ 밝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을거라고 했다. 황현 특유의 맑은 목소리는 다소 우울한 현장에 균열을 내고, 그 사이로 다시금 희망을 싹틔우는 존재였다.
무엇보다 황현의 노래실력은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앞서도 수많은 이들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불렀지만 황현이 부르고, 그의 옆지기인 김호철 작곡가가 편곡한 버전이 이 노래의 대표로 자리매김한 사실, 대학생 당시 강변가요제 출전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고 박은영은 농담과 진담을 섞어서 추억했다.
에너지를 주는 황현의 모습은 암 진단을 받은 이후에도 그대로였다. 황현이 크루켄버그 종양 진단받은 것은 2018년 4월이다. 오랜만에 황현을 만난 노래하던 다른 동지가 왜이렇게 배가 나왔는지 물어봐 병원에 간 것이 계기가 됐다.
모두에게 충격적이었던 그의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온 동지들은 눈물을 터뜨렸다. 이들을 위로하는 것은 오히려 황현 쪽이었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힘내자고 토닥이니, 병문안이 무안할 정도였다. 병세가 악화되기 전까지는, 황현과 간병인 중 누가 환자인지 헷갈려하는 간호사도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던 황현이 아주 크게 오열했을 때가 딱 두 번있었다. 황현 동지를 위한 암 투병 모금이 열린 두 번이었다. 너무 울면 아프고, 아프면 사람들이 걱정할까봐 울고파도 참아왔을 황현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치료비를 십시일반 모은다는 얘기를 듣고는 눈물을 터뜨렸단다. 내가 뭐라고, 동지들 사정이 어떤지 뻔히 아는데, 없는 살림 나눠주는 건데, 그걸 너무 거리낌없이 나눠주셔서 하며 눈물을 터뜨렸단다.
사람들이 황현을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길 바라는지 물은 질문에, 황현의 절친은 “그런 것은 없다”고 말했다. 자기가 굳이 어떤 말을 보태지 않아도, 좋은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기 때문에. 다만 ‘우리 현이’를 만났던 사람이라면, 지금 기억하시는 그대로 오래 기억해 달라고, 현이를 노래로 들었던 사람이라면, 그가 읊었던 노랫말 그대로 기억해달라고 당부할 뿐이다.
가톨릭 신자였지만 ‘냉담’했었던 황현은 세상과의 이별을 앞두기 전, 죽으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빛으로 남는 것이라 믿으며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다. 사람 하나 하나가 다 빛이라, 나도 사라지지 않고 빛이 되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니까 현이는 분명히 어딘가의 빛으로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친구는 말했다.
아픔과 마주하며 외로웠을 친구에게 한번이라도 더 말 붙이고, 보듬어주고, 만져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으레 산 사람은 미안해한다. 우리 현이의 성격 상 남은 식구들 걱정 많이 할 것 같은데, 우리가 있으니까 그런 걱정없이 편히 쉬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박은영은 하늘에 부쳐본다.
따뜻한 웃음으로 가득했던 고인과 눈물로만 이별하는 것은 어쩌면 예의가 아니기에. 고인이 생전 가장 좋아했던 노랫말을 빌려 황현을 추모한다. 천천히, 즐겁게,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