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입장(立場)은 서 있는 장소이기도 하고 생각이나 관점을 뜻하기도 한다. 흔히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쓰기도 하다. 입장에 따라 입장이 달라진다는 말을 만화 <송곳>에서는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라고 표현한다. 입장에 따라 이해관계가 달라진다. 어떠한 사건이나 사실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다 좋은 것도 다 나쁜 것도 아니다. 새로운 상황은 누구에게는 이익을 가져다 주지만 누구에게는 손해를 끼친다.

그림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회담 광경(1876년)
그림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회담 광경(1876년)

1876년 개항을 시작으로 조선사회는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휩쓸리기 시작하였다. 개항 뒤 조선의 무역체제는 조선인들의 생필품인 쌀과 외국에서 들어오는 사치품인 면제품을 교환하는 ‘미면교환체제'로 바뀌어 갔다. 이제 막 자본주의의 문턱에 들어선 일본과 아직 산업자본이 확립되지 못한 청은, 영국제 면제품을 조선에 들여와 비싸게 팔고 곡물과 금을 헐값으로 사가는 중계무역을 통해 이익을 챙겼다. 국내의 소규모 토포(광목) 생산자들은 물론 원료인 면화를 재배하던 농민들, 광목을 사고 팔던 국내의 소상인 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수출품은 주로 쌀·콩 등 곡물과 금·소가죽이었다. 수출품 가운데 70% 안팎에 이르는 곡물은 대부분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지주들은 조선시장에 파는 것 보다 일본 상인에게 더 비싸게 팔 수 있었고 일본상인들은 일본 쌀 값보다 더 싸게 조선 쌀을 사서 이익을 남겼다. 지주들은 쌀을 수출하여 이익을 챙기고 그것으로 다시 땅을 늘려 지주 경영을 강화하였다. 반면에 농민들의 일은 늘어나고 살기가 더 어려워졌다.

수출품과 수입품 쌓이는 곳이 항구였다. 개항을 계기로 인천 부산 원산 목포 등 개항장에서는 화물을 운반하고 포장하는 부두노동자들이 모였다. 농촌에서 떠나온 부두노동자들은 조선인이나 외국인 상업자본가에 고용돼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임금을 받았다.

하역 작업을 하는 부두노동자와 관리자들(1903년)
하역 작업을 하는 부두노동자와 관리자들(1903년)

직업으로 부두노동을 하는 노동자 수가 1893년에 960명, 1900년에 2160명, 1906년에 6840명, 1910년에 8400명 정도로 늘어났다. 임시로 일하는 노동자 까지 포함하면 부두노동자는 이보다도 훨씬 많았다. 부두노동자들은 쌀을 계량하고 포장하는 두량군, 화물운송을 담당하는 칠통군, 지게군, 배에서 짐을 내리는 하륙군이 있었으며, 운반거리와 무게에 따라 임금에 차이가 있었다.

오래 동안 우리 노동운동사에서 최초의 노동조합은 1898년 성진에서 이규순이 47명의 부두 노동자들을 묶어 만든 성진본정부두노동조합으로 알고 있었다. 최초의 노동쟁의는 1898년에 시작한 목포항 부두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이었다. 목포의 부두노동자들은 1898년에서 1903년 사이에 일본자본가의 착취에 저항하여 8차례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임금인하에 반대하는 임금투쟁, 임금의 10%를 떼어먹던 중간착취자인 십장에 대한 반십장운동, 거류지에서 일본패 착용을 반대하는 반 일본패 운동이 중심이었다.

2014년 윤진호 교수는 <개항기 인천항 부두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황해문화>> 83)이라는 논문에서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보>(1892년 5월 13일자) 기사를 근거로 이러한 통설이 잘못되었다고 밝혔다.

“두량군이란 것은 특별한 세금을 납부하고 인천항에서 일본 조선 양국 상인 간에 미곡 수도(受渡) 때에 두량을 하는 특허를 받은 일종의 노동자의 조합으로서, 이들 외의 사람은 결코 두량의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히 이들은 다른 노동자들보다는 권한이 강하다(...)이들은 일본 상인뿐아니라 조선 상인을 대상으로 해서도 때때로 파업(스트라이크)을 일으키는데 그 중에는 조합이 선동하는 것도 많다. 이들은 대략 250명이 넘는 인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역원(役員)을 두어 이를 통솔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사람 이름을 들면(...) 등패 3명, 십장 6명 등이 있는데 등패란 수령과 같은 자이며 십장이란 이 단체의 한 소부분을 통솔하는 자로서 일본에서는 오장이라 부른다.”

1898년 성진본정부두노동조합 이전인 1892년에 이미 인천 부두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쟁의를 벌였다는 것이다.

인천의 부두노동자(1904년)
인천의 부두노동자(1904년)

역사의 해석과 평가는 입장과 관점에 따라 같은 사실을 놓고도 다를 수 있다. 사실조차도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고 연구가 진전되면서 바뀌게 된다. 하나하나 토를 달기 성가셔서 그렇지 우리가 알고 있는사실은 ‘지금 알기로는’,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내가 알기로는’ 이렇다거나 그런 것이다. 1892년 인천 부두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쟁의를 벌이기 전에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쟁의를 벌였는지 지금으로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역사 공부는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을 확신하면서 '정답'처럼 달달 외우는 암기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면서 '명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정답이라 강변하면서 박박 우기는 맹목적인 신념보다 의문을 던지면서 새로운 근거를 찾는 느린 걸음이 역사의 진실에 더 가깝게 다가가는 빠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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