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홍의 청년 비정규노동
김기홍의 청년 비정규노동

방송작가 사건을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 작가라하면 김은숙, 김은희, 노희경과 같이 이름 한 번씩은 들어봤을 법한 인기 드라마 대본을 쓰는 유명작가를 떠올렸다. 하지만 작가는 장르로써 드라마 뿐 아니라 예능,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넘어 심지어 뉴스 작가가 있고, 프로그램 크레딧에 올라오는 메인작가 외에도 서브, 일명 막내작가들이 프로그램을 함께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중요한 것은 이들 방송작가의 대부분이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처럼 일을 하지만, ‘프리랜서’로 계약을 맺고 ‘프리’라는 허울 좋은 변명 뒤에 사용자의 입맛에 따라 ‘자유’로이 썼다가 버려진다는 잔인한 사실이다. 이들은 방송업종의 대표적인 비정규직 노동자다.

작년 최초로 노동위원회에서 MBC방송작가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면서 방송작가들의 실태가 많이 알려졌다. 수년 간 MBC에서 작가로 일해왔던 이들은 정확한 이유도 없이 갑작스러운 전화한통으로 해고 통보를 받고 바로 한 달 후에 해고되었다. 이 사건의 초심은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각하되었지만 결국 재심에서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부당해고까지 인정한 것이다. 그 이후 여러 방송사의 방송작가들이 자신들의 노동자성과 해고의 부당함을 항의하며 더 이상 방송업계에서 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싸움을 시작하고 있다.

지금 내가 담당하고 있는 사건 역시 1년간 한 방송사에서 성실하게 일하다 하루 아침에 해고통보를 받은 방송작가의 사건이다. 여느 방송작가의 사건처럼 쟁점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이들의 노동자성을 입증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형식적인 계약서를 무력화하는 것이다. 이들은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있고, 담당PD의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업무지시와 지휘·감독이 존재하는 종속적인 관계에서 노무를 제공하는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분명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성이 아니라 당사자간에 체결한 계약서의 계약기간이다. 당연히 1년 정도의 계약기간을 정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계약기간의 종기는 1년도 아닌, 몇 월 몇 일로 특정된 것이 아닌, ‘개편 방송 전 일까지’였다.

언뜻 보기에 문제가 없어 보일 수 있겠지만, ‘개편 시’까지가 무엇이 문제일까?

방송사는 수시개편, 정기개편, 편성개편 각종 이름의 개편으로 1년 동안 몇 차례의 방송개편을 단행한다. 미리 계획하고 예정된 개편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사전에 어떠한 공지 없이 갑자기 위에서부터 개편이 결정되고 일방적으로 내려 오기도한다. 결국 위와 같은 계약을 체결한 방송작가들은 소위 언제 잘릴지 모르고 하루아침에 개편이라는 이름으로 계약이 종료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분도 일하는 1년 동안 무려 세 번이나 개편이 있었는데 두 번의 개편에서는 다행히(?) 계약을 연장했지만 세 번째 개편에서 계약 종료를 통보받았다. 총 6명의 작가 중에 이분만 해고되었고 다른 작가들은 계약이 그대로 유지되거나 다른 방송프로그램으로 옮겨갔다.

과거에도 해당 방송사에서 이와 같이 방송작가의 계약기간을 정한 것에 대한 노동조합의 문제제기가 있었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과정에서 바로 잡았던 적이 있었지만 아무도 모르게 다시 계약서에 ‘개편 시’라는 계약기간이 작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만든 방송작가표준계약서(이 것도 사실 문제가 많지만 여기서는 일단 넘어가겠다.) 사용지침에서도 엄연히 계약종료시점을 ‘개편 시’로 작성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권고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결국 이 계약서는 2021년 국회 국정감사에도 올라와 지적을 받게 된다.

이처럼 ‘개편 시’라는 불확정기한을 종기로 정한 계약은 이 사건처럼 오히려 부당해고의 근거로 악용되고 있으며, 이러한 계약이 유효한 것으로 인정된다면 방송산업 종사자들의 고용불안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것은 물론, 방송산업 종사자들의 고용안정과 권리보장을 위해서도 반드시 이번 사건은 부당해고로 인정되어야 하며, 반드시 이러한 형태의 계약은 없어져야 한다.

백번 양보해서 방송 개편을 위하여 방송 제작자들의 교체가 필요하다고 치자. 사실상 원고집필 과정에 작가로서의 창의와 재량은 전혀 발휘될 수 없고, 담당PD의 구체적인 지휘·감독하에 일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일까? 개편을 이유로 짐을 싸는 건 왜 항상 이들이란 말인가. 잘되면 정규직 탓이고 안되면 비정규직 탓으로 돌리는, 비정규직을 두 번 울리는 일은 이제 그만하자. 우리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시작이자, 시대적 과제인 비정규직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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