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의 동지로 만나는 페미니즘
명인의 동지로 만나는 페미니즘

요즘 언론은 존재를 특징짓는 한 가지 속성으로 사람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성별에 따라, 세대에 따라, 나이에 따라,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20대 남성과 여성을 뜻하는 이대남・이대녀, 586 등이 대표적으로 그런 말들이다. 선거가 끝나면 지도에 지역별로 색깔을 달리하여 시뻘겋게 혹은 시퍼렇게 지지율을 표시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심지어 최근엔 서비스 노동자를 모집하는 까페에서 MBTI(성격유형검사)로 사람을 구별하여 어떤 유형의 사람은 우대하고, 어떤 유형의 사람은 아예 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모집 공고를 붙여서 논란을 빚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식의 분류가 꼭 필요하거나 유용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과 집단적 상징들로 어떤 사람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가령, 박근혜와 나는 같은 여성이지만 결코 입장과 처지가 같을 수 없다. 같은 20대 남성이라도 서울 강남에서 건물 한 채쯤은 상속받을 수 있는 사람과 전라남도에서 특성화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의 입장과 처지가 같을 수는 없다. 586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80년대 대학 진학률은 기껏해야 30% 내외였다. 지금 50대 중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대학과 무관한 삶을 살았단 얘기다. 사람들이 50대를 싸잡아 586이라 칭할 때 사람들은 그 시대에 대학에 다니지 않은 70%의 사람들을 과연 떠올리고 있을까? 심지어 같은 586이라도 전부 운동권 명망가들이었던 게 아니며, 당시 민주화 운동에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없었던 사람들이 더 많았으므로 당시 학생 운동의 이력이 지금 누구에게나 벼슬이 된 건 아니다.

위에 언급한 호칭들은 모두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이렇게나 다른 사람들을 싸잡아 묶어 말하는 것은 사실상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호칭들은 아주 쉽게 사람의 얼굴을 지워버린다. 얼굴이 지워진 대상들은 더이상 고유한 개인이 아니라 그저 가상의 집단이 된다. 이와 함께 이러한 가상의 집단에 속한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인 처지와 사정들도 지워진다. 그리고 이 가상의 집단들은 각각의 부족이 되어 서로를 무시하거나 경멸할 수 있고, 공포의 대상이나 적이 될 수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사람은 단 한 가지 정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필자가 페미니즘을 통해 얻은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여성이면 여성・ 노동자면 노동자 등 단 한 가지 속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내 존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내 존재를 분리해서 그 어떤 것도 ‘나중에’라고 말하지 않는 유일한 사상이 바로 페미니즘이었다.

소외와 배제, 양극화와 정치적 극단주의에 내몰린 시대다. 인터넷 강국에서 우리는 매일 매 순간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대개 늘 외롭고 고립되어 있다. ‘분열시켜 지배하라’는 저열한 통치는 끊임없이 새로운 가상 집단을 만들어내며 우리를 갈라치기하는 중이다. 이런 시대를 함께 살아가려면, 그리고 우리가 타인들과 더불어 적어도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을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쉼 없이 쏟아지는 말과 글의 홍수 속에서, 수없이 쏟아지는 이미지나 사건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읽어낼 수 있는 역량 말이다.

오래전에 본 영화 ‘필라델피아’에 인상적인 대사가 있었다. “차별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개인의 가치가 아니라, 그가 속한 집단의 추정되는 특성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것.” 바로 이러한 차별이 ‘분열시켜 지배하는’ 통치의 대표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존경’ 혹은 ‘존중’을 뜻하는 영어 ‘respect’는 ‘re(다시)-spect(보기)’에서 비롯되었다. 개개인은 저마다 고유한 존재들이고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르다. 그러나 우리가 저마다의 삶을 구성하는 맥락을 ‘다시-봄’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존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존중으로 우리는 다시 연결되고, 때로는 서로 다른 입장이더라도 함께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마침내 우리는 우리를 갈라쳐서 이익을 누리는 세력들에 맞서 함께 싸울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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