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제연의 해보자 평등일터!
차제연의 해보자 평등일터!

‘토익 600점, 텝스 480점 이상의 영어능력시험점수’를 지원자격으로 명시한 기업의 채용공고를 볼 때 일을 구려하려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차별금지법에 대한 교육을 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묻지만, 훨씬 더 높은 점수를 기본으로 갖추어도 취직이 될까 말까 한 현재의 구직자들은 2011년 당시 지원자격을 보며 ‘취업하기 더 쉬웠겠다’고 말한다. 물론 당시에도 기업이나 대다수의 구직자들에게 토익 600점은 최소한 갖추어야 할 ‘기본’으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를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한 중증청각장애인에게는 ‘평생 직장을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일률적인 채용공고들을 헤매며 ‘이 사회에 내가 살아갈 자리는 없구나’ 절망했을지도 모른다.

“특정집단을 차별적으로 배제하려는 목적으로 기준을 설정한 것은 아닙니다.”

해당 기업의 해명은 설득력을 갖기 쉽다. 직원이나 아르바이트생을 채용할 때 ‘동성애자는 정중히 사양합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두 번째 숫자가 4인 경우(전라도 출신) 지원 불가’, ‘흑인 사절(혹은 백인만 가능)’, ‘페미니스트가 아니한 자’라고 내건 모집공고와 달리 특정한 누군가를 차별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이거나 명시적이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노동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도 개별 기업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 답을 찾기 어렵다고 느낀다. 채용 여부를 판단하는 데 누군가의 역량을 평가할 수 있는 특정한 자격요건이나 기준이 필요한 것도 일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란에는 역량을 판단하는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질문’들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있다. 채용공고에 명시된 ‘핵심직무’에는 영어 ‘듣기’ 영량이 필수적인가? 근무지는 해외인가, 국내인가? 해당 직무에 영어의사소통 업무는 본질적 혹은 부가적 업무인가? ‘토익 600점’은 추상적이거나 임의적인 기준일 뿐, 그 직무에 적합한 사람(person for the job)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없다. 무엇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청각장애인이 듣기시험에서 해당 점수 이상을 얻는다는 것은 통념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할 때, 장애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중증의 청각장애인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며 이를 ‘고용 상 청각장애인에 대한 간접차별’로 판단했다.

위 사례처럼 겉보기에는 모두에게 중립적인 기준을 적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불리한 결과가 초래되는 경우가 바로 ‘간접차별(indirect discrimination)’이다. 1971년 미국의 ‘그릭스 대 듀크 전력회사(Griggs v. Duke Power Co.)’ 판결은 불평등 효과로 인한 간접차별을 인정한 대표적인 사례다. ‘의도에서조차 중립적인 관행, 절차, 테스트가 만일 이전의 차별적 고용 관행을 유지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면 유지될 수 없다’고 명시한 판결문은 현재 한국사회의 차별적 고용 관행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장애인은 역량이 부족하다’ 혹은 ‘장애인은 생산성․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차별적인 통념이나 노동자의 표준을 ‘비장애인’으로 전제하는 노동시장의 차별적 구조가 이미 공고할 때, 누군가에게는 차별적인 기준조차도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중립적인 것처럼 여겨지기 쉽다.

차별금지법이 차별에 대한 모호한 해석을 담고 있어서 ‘이현령비현령’ 될 수 있다는 주장은 기업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과장된 우려에 기반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차별금지법은 통합적인 차별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제시하면서 간접차별과 같이 개별법에 따라 다른 차별 규율의 범위를 표준화하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간접차별은 ‘이전의 차별적 고용 관행’의 결과이거나 이를 유지하는데 기여하는 역할을 해 왔던 일률적이고 기준, 그래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해왔던 불평등한 기준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위 사례에서도 구체적인 직무에 따라 개개인의 역량을 평가할 수 있도록 장애 등을 고려한 다양한 기준을 마련하라는 것이 권고로 제시된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의 차별 구제에 머무르지 않고 차별적인 관행을 변화시키는데 초점을 두고 이로 인해 시정의 효과 역시 다수에게 영향을 미친다. 물론 기업의 부담이 증가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의 차별할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부담은 그동안 지연시켜왔던 평등에 대한 감각을 훈련하고 변화시켜 나가야 할 책임에 따른 부담일 테다.

하지만 현행법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차별 유형은 직접차별에 집중되어 있거나, 남녀고용평등법처럼 간접차별을 담고 있더라도 엄격한 기준으로 인해 실질적인 차별 구제와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차별에 대한 진정을 조사하고 판단하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이러한 간접차별을 판단한 사례는 드물다. 차별 사유와 영역을 포괄적으로 규정하면서 간접차별이나 차별적 괴롭힘 등 새로운 차별의 개념을 담고 있는 제도적 근거,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차별을 부정할 때가 아니라 더 발견해야 할 때다.”

이미 현대사회에서 차별의 성격이 명시적이거나 의도적인 차별보다 비가시적이고 간접적인 차별로 변화한지 오래다. 차별은 개개인이 아니라 차별을 야기하는 근본적인 사회 통념과 관행, 구조가 문제라고 인식하며 문제제기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구조적 성/차별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부정하느냐, 어느 정도로 심각하게 인식하느냐가 대선 토론회의 주요 질문으로 등장한 현실은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저자 김지혜의 지적처럼 차별을 더 발견할 수 있는 사회적 역량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라는 점을 보여준다.

‘황당하지만 말문이 막히는 경험’ 속에서도 ‘말문을 여는’ 차별 당사자들의 시도가 이어졌기에 우리가 차별을 함께 알아차리고 조금씩이라도 변화시켜 왔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제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말문을 열 언어와 권리를 보장하고 ‘차별은 무엇인가’에 대한 사회적 이해와 기반을 만들어 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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